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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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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활한 국민생활 애국가는 실례다

등록 2013-03-29 18:01 수정 2020-05-03 04:27

긴 겨울 지나고, 새봄이다. 지난주, 잠시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긴 했으나 그래도 봄이다. 봄이면 나들이를 나선다. 영화 구경도 재밌고 동네 공원을 한 바퀴 돌아도 마음이 청신해진다. 그런데 꼬마들 앞세우고 그렇게 산들바람 따라 나섰을 때, 특정한 지점에서 ‘국민의례’를 해야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이를테면 관악산을 오르기 전에 반드시 일동 기립해 애국가를 제창해야 한다면? 아내와 모처럼 호수공원이며 숲 속을 산보하다가 역시 애국가 소리에 한 손을 가슴에 얹고 서 있어야 한다면? 산바람을 쐬고 숲의 소리를 듣는 것 자체로 이 나라에 태어나 해마다 청신한 기운을 맛보는 기쁨으로 절로 ‘애국심’이 솟아날 수도 있을 텐데, 이를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런 강요된 국민의례는 일상 문화에서 ‘거의’ 사라졌다. 영화관에서 ‘애국가’가 사라진 것도 1989년이니, 벌써 사반세기 전의 ‘역사’가 되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그리스의 징계, 한국의 칭송

하지만 여전히 일상 문화에서 ‘애국가’를 트는 곳이 있다. 경기장이다. 3월 초 개막한 K리그 클래식의 여러 경기장에서 어김없이 ‘국민의례’가 진행됐다. 새 시즌을 여는 ‘개막전’에 의미를 둔 것일 수도 있으므로 차차 지켜봐야겠지만, 축구장이며 야구장 혹은 그 밖의 경기장에서 식전 행사의 일환으로 ‘애국가’를 틀어대는 일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프로야구는 1982년 출범 때부터 지금까지, 시즌이나 포스트시즌이나, 국민의례를 한다. 삼성 라이온즈는 한때 타 구단의 입장이나 연맹의 관례와 상관없이 국민의례를 폐지했지만 최근 들어 다시 치르고 있다. 프로농구와 프로배구도 국민의례를 한다.

2002년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선수들의 입장식을 월드컵 방식으로 진행하고, 반칙과 오프사이드 장면을 전광판을 통해 리플레이하는 것을 중단하며, 선수단 격려로 인한 시간 지연을 막는 한편 국민의례는 애국가 1절 부르는 것으로 규정한 적 있다.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일종의 ‘글로벌 스탠더드’로 이렇게 통일한 것이다.

그러다가 2006년에는 당시 14개 구단 중 9개 구단이 경기 시작 전 애국가를 폐지했다. 국가의 공식 행사도 아니요 국가대항전도 아닌, 일반 시민들의 여가 문화에 국민의례를 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느냐는 게 당시의 공감대였다. 아마 당시 정부의 ‘탈권위’ 문화도 이런 결정을 하는 데 배경이 됐을 것이다. 그랬는데, 국가 행사도 아니고 국경일도 아니고 국가대항전도 아닌데, 새봄의 경기장 곳곳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진다?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최근 그리스 AEK 아테네 소속 미드필더 기오르고스 카티디스 선수가 나치식 경례 세리머니를 하여 문제가 됐다. 지난 3월16일의 일이다. 상대팀 베리아와의 슈퍼리그 경기 1-1 동점 상황에서 카티디스는 역전골을 넣은 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팀 서포터스를 향해 오른팔을 45도 각도로 쭉 뻗었다.

그리스축구협회는 신속하게 결정을 내렸다. “그의 행동은 나치 만행에 희생된 이들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라고 규정하면서 “평생 어떤 종류의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상당히 신속하고도 전격적이며 선수 생명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최종적인 결정이다. 카티디스는 “나는 파시즘을 증오한다. 내가 그런 자세의 의미를 알았다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억울해했지만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됐다. 그러나 그의 자세는 해명이 변명처럼 들릴 수밖에 없는 ‘명백’한 동작이었다.

박종우 선수를 생각한다. 런던올림픽 때의 ‘독도 세리머니’ 말이다.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국가대표 2경기 출전 금지와 3500스위스프랑(약 410만원)의 벌금을 내는 비교적 가벼운 징계로 끝났지만, 모두가 함께 생각해야 할 숙제는 남겼다. 기성용은 올림픽 직후 SBS 에 출연해 “경기 직후 그 세리머니를 내가 했어야 했는데 하며 아쉬워했다. 모두들 박종우를 민족투사라며 격려도 했다”고 말했다. 경기장에서의 정치적 의사 표현 금지가 여러모로 얼마나 중요한 사안인가에 대해 그동안 협회와 선수들이 거의 인식하지 못했음을 방증하는 말이다. “그 정도가 뭐 어때서?” 하는 순간, 빗장이 풀리고 마는 것이다.

비록 보수적인 정권이 들어섰다고는 하나 시민의 일상 문화를 과거처럼 전시동원 체제로 만들어버리는 상징 폭력이 재연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더욱이 경기장에서 국민의례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당장의 사회적 현안은 아니다. 그러나 달리 보면 중요한 사안이다. “그 정도가 뭐 어때? 경기 전에 국민의례 한다고 해서 문제될 게 뭐 있나?” 하는 사이에 점점 퇴행적인 사안이 발생하고 그때마다 “뭐 어때?” 하게 될 우려가 있다. 폐쇄적인 서열문화가 지배적인 우리의 스포츠 환경에서 애국가는 복합적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일그러진 위계질서가 비틀어진 애국심과 호응하게 될 위험성 말이다.

일보 후퇴하면 백보 후퇴도 순식간

하긴 그 옛날의 경직된 풍경은 아니다. 몇몇 가수들은 저마다 독특한 창법으로 애국가를 부르기도 한다. 애국가를 들으며 ‘애국심’을 상기하는 선수도 있고 승리에 대한 수선스러운 마음을 다스리며 평정 상태를 회복하려는 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호한 감정의 추측보다 더 확실한 것은 국내 각 종목의 프로 경기란 쾌활한 시민 생활이라는 것이다. 등산이나 낚시나 영화 구경이 그렇듯이 축구나 야구의 국내 리그에서 국민의례를 해야 할 이유를 마땅히 찾을 길이 없다. 자칫 퇴행의 징후가 될 우려도 있다. 일보 전진은 힘겹지만 이보 후퇴는 순간의 일이 아니던가.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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