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얘기다. 그땐 좀 한다고 하면 누구나 ‘탄 빼기’를 구사했다. 최후의 나방 한 마리가 남으면 죽이지 않고 몇 바퀴 빙빙 돌렸다. 그러면 어느 순간 적들이 총을 쏘지 않는다. 일종의 버그다. 덕분에 동전 하나로도 죽지 않고 게임을 오래 즐겼다. 그 시절엔 인간이 기계를 속였다.
전세가 역전되려나보다. 지난 6월14일 게임 역사가 새로 쓰였다. 와 동갑뻘인 게임 (Ms. Pac-Man)에서 무려 만점을 받은 이가 등장했다. 은 일본 남코가 내놓은 아케이드게임이다. 팩맨이 유령들을 피해 미로를 돌아다니며 공을 다 주워 먹으면 미션이 끝난다. 이 게임, 만만찮다. 유령이 어디로 방향을 틀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최고 점수는 26만6330점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99만9999점을 딴 이가 나왔다. 주인공은 ‘말루바’다. 사람이 아니라 마이크로소프트의 인공지능 시스템이다.
고전게임기 ‘아타리 2600’으로 진행한 게임에서 말루바는 이른바 ‘분할정복기법’(divide-and-conquer method)을 썼다. 말루바는 게임을 150개의 작은 단위(에이전트)로 쪼갰다. 각 에이전트는 팩맨의 먹이인 공을 찾거나 유령의 행동을 학습하는 역할을 나눠 맡았다. 에이전트별로 게임의 동작 패턴을 학습한 뒤 이를 합쳐 스테이지를 정복했다.
사실, ‘알파고’로 대변되는 인공지능의 공습은 바둑보다 훨씬 앞서 나왔다. 이세돌과 대국을 1년여 앞둔 2015년 3월 알파고는 알고리즘을 벼리기 위해 아타리 (Breakout) 게임을 연마했다. 알파고는 딥러닝의 일종인 ‘심층강화학습’ 방식을 썼다. 알파고는 처음 10분여 동안은 규칙을 몰라 허둥댔다. 2시간이 지나자 전세가 뒤바뀌었다. 공의 움직임을 파악한 알파고는 현란한 솜씨로 벽돌을 깼다. 4시간 뒤엔 또 다른 진화가 일어났다. 알파고는 한쪽 방향으로 공을 쳐서 벽돌 상단에 가뒀다. 매번 공을 되받지 않고도 상단부터 벽돌을 무더기로 깨는 ‘트릭’을 배웠다. 단위시간당 훨씬 많은 벽돌을 깨고 자신이 실수할 확률을 줄이는 방법을 스스로 깨우쳤다. 나는 이 영상을 보고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물리쳤을 때 못지않은 충격을 받았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과 미국 예일대학 연구원들이 지난 5월 말 공개한 논문은 도발적 제목을 달았다. ‘언제쯤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치를 뛰어넘게 될까?’ 이 논문은 인공지능 연구자 352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를 다뤘다. 연구진은 3년 안에 인공지능이 게임에서 인간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는다고 예측했다. 8.8년 안에 모든 아타리 게임에서 인간을 정복할 것이란 예측도 덧붙였다. 이런 식으로 앞으로 45년 안에 인간이 하는 일의 절반이, 120년 안에 인간의 직업 전체가 인공지능에 의해 자동화될 것으로 내다봤다.
자동화된 세상에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말에서 해법을 찾는다. 그는 지난해 10월 정보기술(IT) 전문지 와의 대담에서 ‘인공지능의 역습’에 대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작은 변수들이다. 그들은 돌연변이이고 주변인이고 성격이상자이지만,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호기심이 반짝이는 한, 미래에도 빛이 있다. ‘호모 게이머스’가 종말을 맞더라도 ‘호모’까지 멸망하진 않는다.
이희욱 기자 asadal@bloter.net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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