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새해 벽두, 일본 TV 프로그램 에 출연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김대중 대통령과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를 공개했다. 1998년 초,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안고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이 손정의 회장에게 만남을 요청했다. 손정의 회장은 ‘친구’ 빌 게이츠와 함께 김 대통령을 찾았다.
김 대통령이 물었다. “한국이 망할 것 같은데, 아이디어가 없겠소?” 손정의 회장은 “3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첫째 브로드밴드, 둘째 브로드밴드, 셋째도 브로드밴드”라고. 빌 게이츠도 100% 찬성한다며 거들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초고속 인터넷을 온 나라에 보급했고,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망을 갖게 됐다고 손정의 회장은 회상했다. 2015년 기준으로 한국의 인터넷 평균 속도는 22Mbps로 전세계 1위다.
아무리 좋은 차도 도로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한국을 외환위기에서 건진 건 정보기술(IT) 산업이었지만, 그 뒤는 빠르고 넓은 인터넷망이 받쳐줬다. 허나, 나라마다 사정이 똑같은 건 아니다. 전세계 72억 인구 가운데 40억 명은 아직도 인터넷에 접속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이들에게 웹은 여전히 닿지 않는 수평선 너머 대륙이다. 접속이 허락되지 않는 이에겐 정보도, 미래도 없다.
그래서 필리핀 사례는 흥미롭고도 인상 깊다. 필리핀은 7천여 개 섬으로 이뤄진 나라다. 이 가운데 민다나오 지역은 아름다운 해변으로 유명하다. 보홀섬에서 세부를 거쳐 남레이테주에 이르는 156km 길이의 해변은 아름다운 풍광으로 유명하다. 산호초 군락과 맹그로브숲이 어우러진 관광지요, 해양생물의 보고이기도 하다. 그런데 몇 년 새 보홀섬이 위기를 맞았다. 최근 5년 동안 이 지역 어족 자원의 90%가 사라졌다. 생업에 내몰린 어민들이 물고기를 남획한 탓이다. 먹거리가 사라지며 일자리가 줄어들었고, 미래도 불투명해졌다.
필리핀 정부는 생존의 파도에 떠밀린 어촌 마을을 디지털 네트워크에 태우기로 했다. 디지털 수혈 작업은 두 가지를 염두에 뒀다. 어민들을 정부 어족자원 관리 시스템에 등록시켜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여기에 정부와 주민이 더 쉽게 소통하고 어민들도 어업 관련 정보를 더 빠르고 편리하게 받아볼 수 있으니 금상첨화 아닌가.
그 첫걸음은 인프라, 즉 초고속 인터넷망을 까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방이 바다인 보홀섬은 유선망을 깔기가 만만찮았다. 필리핀 정보통신부와 해양수산자원국은 마이크로소프트, 미국 국제개발처(USAID)와 손을 잡았다. 이들은 TV 유휴 주파수, 이른바 ‘TV 화이트스페이스’에 눈을 돌렸다.
TV 화이트스페이스는 TV 방송용 주파수에서 방송사업자가 쓰지 않는, 빈 주파수 대역을 일컫는다. 주파수 간섭을 막기 위해 비워뒀거나, 방송을 송출하지 않을 때 비어 있는 주파수다. 이를 활용하면 따로 망을 깔 필요 없이 기존 TV 중계기를 활용하면 되는데다, 인터넷 속도도 빠르고, 무선으로도 연결할 수 있다. 그래서 기존 인프라가 닿지 않는 산간벽지나 낙도, 오지를 연결하는 통신망으로 주목받아왔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미국 국제개발처는 필리핀 정부와 함께 보홀섬 어민들을 위한 인터넷 보급 파일럿 프로젝트를 2014년 4월 시작했다. 1년8개월여 동안 보홀 지역 어민 1만6천여 명이 정부의 어족자원 관리 시스템에 등록했으며, 이들 가운데 4천여 명은 ‘TV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해 등록했다. 인근 20개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 3천 명도 기존 TV망을 이용해 인터넷을 이용하고 있다. 현재 2만여 명에 이르는 보홀 지역 주민들이 TV 인터넷 서비스 혜택을 누리고 있다.
이들이 접속한 건 어족자원 관리 시스템뿐만은 아니었다. 인터넷으로 공공서비스 시스템에 접속하자 의료와 교육, 보험과 저소득층 지원 프로그램도 딸려왔다. 필리핀 정부는 TV 인터넷 프로젝트를 보홀섬 외부 지역까지 확장 중이다. 전체 국민의 99%가 이 서비스로 초고속 무선인터넷을 쓰게 하는 게 정부 목표다. 미국 국무부는 지난해 이 실험을 ‘2015년 최고의 민관 파트너십 프로젝트’로 공식 선정했다.
이희욱 기자 asadal@bloter.net※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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