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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를 일깨운, 삶을 잇는 인용… 마르잔 사트라피의 영면에 부쳐

이란의 역사와 페미니즘을 알려준 ‘페르세폴리스’의 저력
등록 2026-08-20 21:44 수정 2026-08-26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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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잔 사트라피는 1969년 이란에서 태어나 이란 혁명(1979)과 이란-이라크 전쟁 등을 겪었고 10대 시절 유럽에서 유학한 후 이란으로 돌아왔다. 결국 1994년에 이란을 떠나 프랑스로 향한다. 2000년에 작업을 시작해 2003년에 완결한 '페르세폴리스'는 이 삶의 여정을 담은 자전적 만화다. 휴머니스트 제공

마르잔 사트라피는 1969년 이란에서 태어나 이란 혁명(1979)과 이란-이라크 전쟁 등을 겪었고 10대 시절 유럽에서 유학한 후 이란으로 돌아왔다. 결국 1994년에 이란을 떠나 프랑스로 향한다. 2000년에 작업을 시작해 2003년에 완결한 '페르세폴리스'는 이 삶의 여정을 담은 자전적 만화다. 휴머니스트 제공


나는 오래전에도 ‘페르세폴리스'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붙든 말은 ‘무지'였다.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무지를 ‘페르세폴리스' 덕에 깨달았다고 썼다. 10년이 지났다. 그사이 첫 한국어 번역본인 ‘페르세폴리스’ 1·2권(새만화책)은 2017년 즈음 출판사 폐업과 함께 절판됐다. 한동안 중고가가 정가를 웃돌며 거래되더니 2019년에야 휴머니스트에서 합본판이 다시 나왔다. 오래 사랑받는 이 작품을 나는 구판과 신판 모두 주기적으로 다시 읽고 수업 교재로도 활용했다. 그 시간 속에서 새로운 것이 눈에 띄었다. 그것들을 10년 만에 꿰어본다.

내 눈에 띈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페르세폴리스’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페르세폴리스’와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바로 인용이다. 페미니스트 이론가 사라 아메드는 인용이라는 행위를 두고 ‘페미니스트 기억’이자 ‘먼저 걸어간 사람들에게 빚졌음을 깨닫는 방식’이라 했다. 이때 인용은 단순히 어떤 구절을 다시 발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구절이든 제목에 대한 언급이든 감상문이든 상관없이,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이룩하는 효과다. 누구를 존재하게 하고 누구를 지우는가에 관여하는 정치적 행위가 인용인 것이다. 이를테면 ‘페르세폴리스’에 “영원히 변치 않을 나의 인생 책”이라는 찬사를 보낸 임경선 작가의 추천사도 인용이다. 2년여 절판 끝에 돌아온 ‘페르세폴리스’의 새 판본 소개 페이지에는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의 추천을 받는 만화가 있을까?”라는 반문이 있다. 많은 이의 다채로운 추천과 언급, 곧 수많은 인용에 의해, ‘페르세폴리스’는 다른 여러 곳과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에 단단히 자리 잡아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인용이 이룩하는 효과

 

그런데 세계는 어느 정도 굳어진 고전 또는 정전의 리스트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대체로 남성적이고 문자 중심적인 세계의 구성물이다. 동료들과 함께 ‘웹툰 내비게이션’(2022) 100선을 준비하며 ‘한국만화 명작 100선’(2012)을 따져봤을 때 여성 작가의 작품은 10편을 겨우 넘겼다. 유수의 도서 목록에 만화책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그나마 ‘페르세폴리스’는 그 목록에 끼는 만화다.) 이런 세계이기 때문에 여성 작가의 만화책을 인용하는 일은, 문화적 정전의 지위를 공평하게 재분배하는 일이며, 그러지 않았더라면 잊혔을지 모를 작품의 가치를 이어가는 일이 된다. 그리고 이는 책이나 작품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페르세폴리스’는 그러한 살아 있는 삶의 인용을 관찰하기에도 더없이 적절한 텍스트다.

주인공 마르잔 사트라피는 이란에서 전쟁과 억압을 피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을 갔다. 10대 중반에 홀로 타지에서 살아가는 마르잔은 괴롭고 힘들지만, 그나마 마르잔을 버티게 하는 것은 과거로부터 인용되는 것들이다. 살기 위해 책을 읽을 필요를 느꼈을 때 마르잔의 생각은 이렇게 흐른다. “교양을 쌓으려면 모조리 깨우쳐야 했다. 나는 나 자신, 마르잔, 즉 여성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래서 엄마가 제일 좋아하던 책부터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집어 든 책 ‘제2의 성’(시몬 드 보부아르)은, 서구 페미니즘 이론의 계보보다는 엄마를 경로로 하여 마르잔에게 도착한다. 엄마의 인용이자, 엄마의 삶을 통한 인용이다.

 

 

휴머니스트 제공

휴머니스트 제공


인용으로 깨달은 것들

 

할머니도 수차례에 걸쳐 중요하게 인용된다. 빈에서 프랑스인인 척하는 게 편해서 그렇게 행세하고 다니던 시절, 마르잔은 할머니의 말을 떠올린다. “늘 품위를 잃지 말고, 너 스스로에게 정직하도록 해라.” 그 말에 힘입어 정직을 되찾자, 1년 만에 처음으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느낀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또 다른 장면에서 할머니는, 정색과 꾸짖음으로 인용된다.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죄 없는 사람에게 누명을 씌운 일을 부끄럼 없이 늘어놓는 마르잔에게 할머니가 소리를 지른다. 그것이 처음이었기에 마르잔은 분노의 무게를 명확히 깨닫는다. 그 표정과 함께 할머니는 ‘페르세폴리스’ 안에 준엄하게 인용되며 마르잔뿐만 아니라 독자의 삶까지 지원한다. 인용하고 인용된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자신이 살아오며 배운 것을 출처를 잊지 않고 기입한 ‘페르세폴리스’에서 시작해, 사트라피는 동명의 영화와 몇 편의 만화 작업을 통해 인용을 이어나갔다. 2019년 연출작인 영화 ‘마리 퀴리’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선망하던 여성 롤 모델을 인용하는 일이기도 했다. 사트라피와 사트라피의 작업은 이제 이란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곳에서, 이란의 역사와 페미니즘을 이해하기 위해 인용된다. 인용되는 자리에서도 사트라피는 인용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협업으로 펴낸 마지막 만화책 ‘여성, 생명, 자유’(2023)는 제목부터가 인용이다. 2022년 쿠르드계 이란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금된 후 숨졌을 때 이란에서, 또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시위의 구호이자 이름이다. 이 선집을 통해 오랜만에 만화로 돌아온 사트라피는 이란 안팎의 예술가, 활동가 스무 명 남짓과 함께 마흐사 아미니를 기리고 시위의 의미를 규명했다.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지만 사트라피가 남긴 인용의 글귀 하나만 영문판에서 옮겨 둔다.

“정권은 40년이 넘도록 자신들의 법을 강요하려 애써왔다. 하지만 그 시작점부터 여성들, 남성들, 젊은이들과 덜 젊은 이들, 그리고 디아스포라의 구성원들은 끝없는 창의력으로 이에 맞서왔다.”

‘여성, 생명, 자유’(국내 미출간) 2024년 영문판 표지. Seven Stories Press 제공

‘여성, 생명, 자유’(국내 미출간) 2024년 영문판 표지. Seven Stories Press 제공


인용을 이어나간다는 것

 

10년 전 나는 ‘페르세폴리스’가 내 무지를 알게 했다고 썼다. 이제는 이렇게 쓰겠다. 이 작품은 내가 아는 것들이 누구에게서 어떻게 이어졌는지도 깨닫게 했다고. 2026년 6월4일, 마르잔 사트라피는 세상을 떠났다. 고인을 기리며, 이제 더는 스스로 인용할 수 없는 사트라피 대신, 그의 책들을 다시 펴고 다음 사람 손에 건네고 싶다. ‘페르세폴리스’를 둘러싼 인용을 이어나가고 싶다. 그의 유지가 담긴 ‘여성, 생명, 자유’의 한국어판 출간도 촉구한다.

 

조익상 만화평론가·서원대 웹툰콘텐츠학과 교수

 

* 만화의 칸과 칸 사이, 칸새에서 출발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6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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