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는 엄중한 현실이다. 하는 일이 내가 뜻하던 바와 달라도, 일터가 좇는 바가 내 가치관과 틀어졌어도, 함부로 박차고 나가지 못한다. 이제 중년인 그대는 치솟는 혈기대로 살 때의 어려움을 너무 잘 아는 탓이다. 늙어가는 나를 받아줄 곳은 많지 않다. 게다가, 어느덧 책임이 권리보다 많아졌다. 늙은 부모, 학령기 자녀, 자신의 노후 등 내 어깨에 매달린 것들을 챙겨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당신은 오늘도 버틴다. 미래에 대한 기대는 진즉 사라졌다. 이제는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만 문제일 뿐이다. 하루하루 내 영혼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과 고달픈 일상이 거듭된다. 이런 중년의 삶에 희망이 과연 있을까?
이런 우울함에 자주 휩싸인다면 이마누엘 칸트(1724~1804)의 삶을 살펴볼 일이다. 칸트는 가난했다. 그는 주당 20시간에 이르는, 그것도 일정한 봉급도 없는 사(私) 강사 생활을 14년이나 한 뒤에야 겨우 교수가 됐다. 이때 나이가 마흔여섯, 하지만 이나마도 칸트가 원하던 자리는 아니었다. 그는 윤리를 가르치고 싶었지만, 대학 당국은 칸트에게 논리학, 형이상학을 맡겼다. 그래도 칸트는 불평할 처지가 못 되었다.
더구나 그는 모든 사람의 평등함과 합리적인 이성을 따르는 계몽주의자였다. 하지만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의 교수는 ‘국가 공무원’이다. 그는 왕의 존귀함과 권위에 무조건 복종해야 했다. 그의 바람과 현실이 줄곧 어긋나 있던 셈이다. 그런데도 칸트는 담담하고 조용하게, 삶을 잘 꾸려나갔다. 그는 언제나 친절하고 유쾌했다. 좋은 교수이고 왕의 신하였으면서도, 한 시대를 바꾼 ‘혁명적인’ 계몽주의자이기도 했다. 칸트는 이 모두를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게 했을까?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담겨 있다. 이 짧은 글에서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근무 중인 장교가 상관의 명령이 적절한지 유용한지를 논의하고 따지는 일은 쓸데없다. 그러나 그가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 병역 의무의 문제를 지적하고 이를 세상의 판단에 호소하는 것은 금지될 이유가 없다.”
칸트가 이 글에서 뜻한 바는 분명하다. 근무시간에 우리는 자신이 속한 조직의 판단과 지시에 따라야 한다. 하지만 업무에서 놓여났을 때 우리는 ‘자유인’이다. 따라서 스스로 판단해 자기 생각을 펼쳐도 된다. 생각할수록 당연한 말 아니겠는가.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일터에서 ‘계약’에 따라 나의 시간과 노동력을 바칠 뿐, 퇴근 이후에 나는 ‘자유인’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은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노예처럼 출구 없는 인생을 꾸려간다. 왜 그럴까? 칸트의 말을 더 들어보자.
“계몽이란 (…)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란 다른 이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다. (…) 미성년의 원인이 지성의 부족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을 펼치려는 용기와 결단이 부족해서라면, 그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그러니 ‘과감히 알려고 하라!’(Sapere aude), ‘너 자신의 지성을 펼치도록 용기를 내라!’ 이것이 계몽이 뜻하는 바다.”
아무리 강하게 나를 옥죄는 일터라 해도, 퇴근 후에 나는 다시 자유인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칸트가 바로 그런 삶을 살았다. 그는 충실한 국가 공무원이자 왕의 신하였지만, 일터에서 벗어나서는 엄연한 자유인으로서 왕권의 신성함에 맞서 모든 사람은 평등함을, 그리고 합리적인 생각에 따라 계몽적인 생각을 펼쳐야 함을 주장했다.
평생 목줄에 매여 살던 짐승은 줄을 풀어줘도 멀리 달아나지 못한다. 우리 인생도 그러하다. 자유도 연습해야 누릴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자기다운 자신이 되기 위해,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이를 만드는 데 얼마나 시간과 공력을 보내는가? 자유로운 시간에 ‘좋은 삶’을 상상하고 생각을 정리해 세상을 향해 주장을 펼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긍정적으로 바뀐다면 신산스러운 현실을 떨칠 가능성 또한 조금씩 열릴 것이다.
칸트는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자유인답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법을 친절하게 일러주기까지 한다.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는 ‘자유인 되기를 위한 매뉴얼 북’이라 할 만하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자연법칙에 따라서만 움직인다. 하지만 이성을 갖춘 사람은 다르다.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다. 배고프다고, 화났다고 해서 여느 생명이 그렇듯 몸과 감정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사람도 몸을 가졌으므로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이러면서도 자유를 갖고 있기에 자신의 의지로 본능을 이겨내며 올곧은 쪽으로 삶과 세상을 이끌 수 있다. 칸트는 우리에게 자연법칙보다 ‘도덕법칙’을 따르라고 말한다. 법칙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통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법칙이 아닐 터다. 도덕법칙도 ‘법칙’이다. 따라서 이성을 가진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우리가 왜 “사람이라면 저럴 수 없는 거야”라고 말하는지 떠올려보라. 그렇다면 도덕법칙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이를 알 수 있을까? 칸트는 다음 말로 명료하게 해답을 준다. “내 의지가 뜻하는 바가 보편적인 법칙이 될 만한지 따져서 행위하라.”
칸트는 예를 들어준다. 내가 갚을 능력이 없는데도 돈을 빌리기 위해 충분히 갚을 수 있다고 거짓말했다고 해보자. 이때 내 행동은 옳을까?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처럼 돈을 빌리기 위해 서슴없이 거짓말한다고 생각해보라. 이런 상황은 물론 옳지 않다. 세상이 이내 엉망진창이 되는 탓이다. 자연법칙에는 예외가 있으면 안 된다. 도덕법칙도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항상 처신하기에 앞서 내 생각과 행동이 ‘보편적 법칙이 될 만한지’ 따져보라. 이는 인간 사회가 제대로 서기 위해서 누구나 무조건 따라야 하는 ‘정언명령’이다. 나아가 칸트는 이렇게도 말한다.
“네가 너의 인간성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인간성까지도 단지 수단으로만이 아닌 언제나 목적으로도 대하도록 행위하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최종 목적은 결국 나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이 제대로 살게 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어떤 가치가 옳은지에 대한 판단과 선택은 모두 인간의 가치를 제대로 세우고 살리는지에 따라 내려져야 한다.
칸트는 자유도 연습해야 한다고 했다. 앞서 설명했듯, 자유인답게 생각하는 연습은 간단하면서도 분명하다. 그러니 일상에서 이를 꾸준히 펼쳐보라. “내 생각, 혹은 누군가의 주장이 과연 법칙처럼 누구에게나 적용될 만한가? 이런 판단, 행동이 과연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고 있을까?”
이런 물음들을 자신에게 던지며 ‘판단 연습’을 꾸준히 펼쳐나간다면 어느덧 내 영혼은 옹골차고 단단해진다. 녹록지 않은 삶의 현실을 넘어서지는 못하더라도, 내 안의 자유인다운 면모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소리다. 몰락해도 고귀한 기품이 스러지지 않는 명문가 자제처럼, 내게도 자유인다운 품격이 살아 있을 터다. 그러니 중년에 다다른 그대여, 세상에 주눅 들지 말라. 자유인다운 자세와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 자신의 정신을 튜닝(tuning)하라.
칸트는 이런 태도로 사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면, 세상은 마침내 ‘목적의 왕국’으로 바뀌게 된다고 말한다. 인류사회가 비로소 약육강식이라는 자연법칙에서 벗어나,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존귀하게 여기는 곳으로 바뀌게 된다는 의미다.
칸트는 유연한 사람이었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의 시대를 살았다. 왕과 권력은 날이 서 있었고, 지식인이라면 검열과 처벌의 위험을 피하기 어려웠다. 칸트는 대놓고 왕의 권위에 맞서지 않았다. 종교에 대해 비판하지 못하게 하면, 정치에 대해 말했고, 정치를 말하지 말라고 하면 자연의 원리와 철학을 논했다. 그래도 칸트의 태도는 비굴해 보이지 않는다. 칸트에게는 언제나 ‘자유인다운 품격’이 살아 있었던 까닭이다. 맞서지 않았던 칸트는 세상에 지지 않았다. 칸트의 철학과 계몽 정신은 마침내 세상을 더 평등하고 합리적인 모습으로 이끌었다. 그렇다면 중년인 그대는 신산스러운 일과를 견디며 어떤 꿈을 꾸어야 할까? 힘들고 어려워도 자유인다움을 꾸준히 연습하시길 바란다. 세상은 자유인을 죽일 수는 있어도 이기지는 못한다. 이런 사람이 된다면 세상살이가 더는 버겁지 않다.
안광복 서울 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반백철학: 교사이자 철학박사인 안광복이 오십 대에게 철학을 처방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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