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은 무거운 나이다. 가정을 꾸렸다면, 사춘기 언저리의 자녀와 병들고 늙어가는 부모를 챙겨야 할 터다. 직장 안에서도 직원들을 이끌며 실무 책임을 짊어져야 할 시기다. 집에서도, 일터에서도 한없는 의무들이 어깨를 짓누른다. 그런데도 이 모두를 감당해야 할 중년은 무너지는 중이다. 갱년기를 지나며 체력은 예전 같지 않고, 마음도 여리고 약해진다. 그래서 벌어지는 상황이 늘 버겁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세대가 내 자리를 노리며 치고 올라오고 있다. 능력 없고 지친 가장(家長)인 나에게 쏟아지는 하소연과 원망에 가슴이 움츠러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책임은 한없이 무겁고 미래는 답답한, 중년의 나는 어찌해야 할까?
힘들고 버거울 때는 비슷한 상황을 겪는 동년배만큼 좋은 벗이 없다. 오십에 이르러서야 플라톤 <국가>나 공자의 <논어>와 같은 책들이 비로소 다가오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국가>를 쓰던 시기의 플라톤의 나이는 오십 줄이었다. <논어> 역시 공자가 오십 이후 세상에서 밀려나 제자들에게 펼쳤던 지혜를 담고 있다. 오십 대의 삶은 대부분 정점을 지난 상태다. 이대로 인생이 스러질지, ‘성숙과 지혜로움’이라는 인생 후반부 성장으로 이어질지 하는 갈림길에 선 셈이다. 이런 중년들에게 오십 줄에 써내려간 현자들의 책은 지혜를 안긴다. 오늘 소개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21~180) 역시 중년의 위기를 넘어서게 하는 ‘영혼의 인도자’라고 할 만하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황제였다. 그의 오십 대 역시 신산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마르코만니족은 로마 군단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황제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 독서와 명상을 좋아하던 철학자 황제는 갑옷을 갖추고 전장으로 향했다. 이미 수도 로마에서도 재정이 결딴난 나라를 수습하느라 그에게는 휴식을 누릴 틈도, 사색에만 빠져 있을 여유도 없었다. 아우렐리우스의 처지는 무거운 의무로 일상이 사라진 여느 중년과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전투 경험이 없는 그는 수많은 군단병을 움직여야 했다. 부담과 두려움이 가득할 법한 현실에서, 오십 줄에 접어드는 초보 사령관 황제는 어떻게 처신했을까? 그는 <명상록>에서 담담히 말한다. “너의 마음을 괴롭히는 어떤 일에 부딪히면 이를 불행으로 여기지 마라. 이를 슬기롭게 견뎌내는 것을 행복으로 여겨라.”
유능한 농구감독은 선수들이 상대 흐름에 말려들어 당황할 때 작전타임을 외친다. 선수들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냉철하게 경기를 풀어나가게 하기 위해서다. 아우렐리우스 또한 잘린 손발과 머리가 가득한 전쟁터에서도 시간을 내어 자기 마음을 추스를 줄 알았다. “자주 철학으로 돌아가 휴식하라.” 이 또한 <명상록>에 나오는 명언이다. 젊은 혈기는 이성줄을 놓아버리게 한다. 분위기에 예민하게 휩쓸린다는 뜻이다. 반면 지혜로운 중년은 꿈틀거리는 감정을 다독이며 한 박자 천천히 간다. 그리고 차분하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찬찬히 짚어보곤 한다. 이런 태도가 아우렐리우스가 말하는 ‘철학으로 하는 휴식’이다.
뛰어난 궁수는 화살을 쏘는 데 온 정신을 모은다. 그러나 일단 시위를 떠난 화살에 대해서는 마음을 내려놓는다. 과녁을 맞힐지 못 맞힐지는 이제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은 탓이다. 결과에 신경 쓰다간 되레 감정이 흔들려 활쏘기가 엉망이 될 수도 있다. 아우렐리우스를 비롯한 스토아 철학자들이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도 이와 같았다. “해야 할 일을 하되, 벌어질 일은 벌어지게 두라.”
아우렐리우스는 최선을 다해 유능한 사령관이 할 만한 일을 했다. 하지만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에는 무심했다.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읊조렸을 듯싶다. “나는 마르코만니 부족을 이기고 로마를 지키리라. 운명의 여신이 허락하신다면.” 최선을 다해 마땅하게 일하되, 결과에 대해서는 초연하라. 이 문장에는 아우렐리우스의 처세법이 오롯이 담겨 있다.
조직이 잘나갈 때 경영자는 우러름을 받는다. 그러나 실적이 실력에서만 난다는 법은 없다. 우연과 상황이 성공을 만들어주기도 하지 않던가. 행운이 다해 그이의 운명이 나락으로 떨어질 때, 세상은 그를 비웃고 욕한다. 반면 망해가는 가운데서도 의연하게 할 일을 하며 버티는 경영자는 어떨까? 결과와 상관없이 그는 존경받으며 세월이 흘러도 평가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헤라클레스가 자기 집에 눌러앉아 호화롭게 살면서 잠이나 편안하게 자고 있었다면 그는 헤라클레스일 수 없었다.” 고통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어도 담대하게 맞서라는 뜻이다.
약하고 늙은 초보 사령관을 어느 젊은 경쟁자는 ‘노파 철학자’라고 대놓고 빈정거렸다. 그래도 아우렐리우스는 개의치 않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는 데 신경 쓸 뿐이었다. 젊음은 치기에 휘둘리며 모욕감에 치를 떤다. 그러나 지천명(知天命)의 경지에 다다른 중년은 하늘의 뜻에 귀 기울일 따름이다.
내 삶이 우주가 연출하는 한 편의 비극과 같다면, 주인공으로서 나는 어떻게 해야 영웅다울 수 있을까? 고통의 기나긴 터널을 지날 때 스토아 철학자들은 항상 이 물음을 가슴에 품었다. 아우렐리우스도 그랬다. 죽음도, 전쟁의 승패도 그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아우렐리우스는 ‘지금 이 순간’의 자기 역할에만 오롯이 충실할 뿐이었다. 결과가 잘못돼도 어쩔 수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아우렐리우스는 이후로도 긴 세월 동안 전쟁터를 떠돌아야 했다. 그는 <명상록>을 최전방 기지인 카르눈툼 등에서 썼다. 이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었다. 바쁜 일과 틈틈이 시간을 내어 마음을 고르기 위해 자신에게 쓰는 편지와도 같았다. 그는 자신이 불안과 슬픔에 휘둘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자기 방치는 아동학대보다도 잔인하다. 마음이 흔들린다면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작전타임을 외쳐야 한다. ‘차 한잔의 여유’는 그래서 필요하다. 사색을 즐겼던 아우렐리우스는 평생 한적한 이탈리아의 시골에서 살기를 바랐다. 안타깝게도, 시대는 그에게 한갓진 생활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우렐리우스는 무너지지 않았다. 굳건히 ‘내면의 성채’를 쌓고 틈틈이 그곳으로 들어가 명상하며 영혼을 다시 북돋웠던 덕분이다.
그렇다면 첩첩산중 책임으로 둘러싸인 중년의 고개를 우리는 어떻게 넘어야 할까? 아우렐리우스도 태어나면서부터 차분하고 책임감 넘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 또한 젊은 시절, 사냥과 스포츠를 즐기며 친구들과 어리석은 장난에 빠지기도 했나보다. 오십 줄에 다다른 그의 현명한 모습은 끊임없는 자기 수련의 결과였다. <명상록> 1권에는 아우렐리우스에게 가르침을 준 인물들이 빼곡히 등장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가 어떤 식으로 좋은 삶의 기술을 익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불안과 공포가 마음을 움켜쥘 때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물었을 듯하다. “내 아버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께서는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 “철학자 섹스투스라면 나에게 어떤 충고를 안길까?” 중년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겪었다. 그 가운데 좋고 훌륭했던 이들, 또는 그렇게 해서는 절대 안 되는 인물들을 떠올려보라. 지금 상태를 다른 분이라면 어떻게 헤쳐가려 할까? 나이 들수록 내 나이 때 부모님이 어땠을지 자꾸만 생각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인생 선배들의 삶은 언제나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길잡이가 되는 까닭이다.
나아가,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렇게 가르친다. 죽음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이는 모든 삶이 맞아야 하는 후반기 과정일 뿐이다. 그래도 죽음을 의연하고 훌륭하게 맞이하는 삶과 비참하고 부끄럽게 최후를 맞는 삶은 다르다. 이 둘의 차이는 고난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달렸다. 인생 후반기, 의무로 어둑한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재산과 명예는 어쩌지 못해도, 내 인생이 좋은 생인지 아닌지 하는 선택은 여전히 나에게 있다. 의무의 중압감 앞에서 의연했던 아우렐리우스의 삶에서 혜안을 찾기를 바란다.
안광복 서울 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반백철학: 교사이자 철학박사인 안광복이 오십 대에게 철학을 처방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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