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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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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타는 중년,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들

사추기의 불안, 노년을 준비하라는 신호일 뿐… 세상의 눈치에서 벗어나 자기다움 찾아야
등록 2024-10-25 22:46 수정 2024-10-28 08:30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위키미디어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위키미디어


가을을 타는 분이 적지 않다. 차가워지는 날씨, 마음도 외롭고 헛헛해진다. 그래서 가슴을 달래줄 인연이 그립다. 인생의 가을을 맞은 중년들도 그렇다. 세상이 나를 보는 눈이 예전 같지 않다. 차갑게 가라앉는 삶, 영혼 한구석에 찬 바람이 인다. 이럴수록 인생을 다시 따뜻하게 데워줄 새로운 사랑에 대한 갈망이 피어난다. 소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그려지듯, 인생 후반기에 마침내 찾아든 불같이 뜨겁고 순수한 중년의 사랑 말이다. 하지만 중년의 사랑은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인 경우가 무척 많다. 나한테는 사랑이었어도, 냉정하게 보자면 흔한 치정(癡情)이나 불륜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왜 그럴까?

화려하지만 결국 바닥을 뒹굴 운명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기원전 106~43)는 이 물음에 답을 안기는 철학자다. 그에 따르면, 인생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또한 각각에는 걸맞은 특징이 있다. 유년기에는 연약함이, 청년기에는 격렬함이, 중년기에는 장중함이, 노년기에는 원숙함이 어울리는 식이다. 젊은이의 강렬하게 타오는 사랑은 아름답다. 하지만 사랑에 눈먼 중년도 그럴까?

다 자란 성인이 아이처럼 칭얼대는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앳돼 보이게 차려입고 젊어 보이려 애쓰며, 어린 애인의 환심을 사려 하는 중년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이런다고 떠나가는 젊음이 다시 내게 돌아오지 않을 테다. 중년의 연애 감정은 낙엽과도 같다. 순간 화려하지만 결국 떨어져 바닥을 뒹굴게 될 운명이라는 뜻이다.

물론, 중년의 성(性)은 여느 청춘들만큼 강렬하다. 함께 인생의 가을을 겪고 있는 중년들끼리의 끌림도 풋사랑처럼 순수하고 진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현실을 잊게 하는 중독성 강한 진정제에 가깝다. 사랑을 나누는 순간만큼은 삶의 열정이 되살아날지라도, 그 장면이 끝나면 다시 불안과 헛헛함에 시달리게 되는 탓이다. 절절한 늦사랑이 집착과 의심으로 흐르다 ‘뒤끝 작렬인 추한 사랑’으로 주저앉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오십 무렵의 공허함과 헛헛함은 육체적 사랑으로 메워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 좋아하던 장난감을 받는다고 청년의 불안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중년들의 빈 가슴은 나이에 걸맞은 방식으로 채워져야 한다.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포스터.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포스터.


키케로는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가 했던 말을 담담하게 들려준다. 어떤 사람이 노년의 소포클레스에게 물었다. “선생님, 나이 들어 더 이상 쾌락을 누리시지 못하니 서운하지 않으십니까?” 시인은 정색하며 답한다. “무슨 말을 그리하는가! 나는 이제야 사납고 무자비한 주인에게서 벗어난 듯한데!”

플라톤에 따르면, 쾌감이란 ‘악을 낚는 미끼’일 뿐이다. 얼마나 많은 유혹과 타락, 실수와 부끄러움이 거친 욕정 탓에 일어나는지 떠올려보라. 강한 본능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다. 반면, 중년에 이르면 욕망에서 예전 같은 절실함이 사라져간다. 덕분에, 본능적 욕구에 멱살 잡혀 끌려다니던 이성이 마침내 제대로 힘을 쓸 기회가 늘어난다. 그래서 키케로는 “노년은 매우 영예로운 시기”라고 강조한다. 거친 욕망에서 놓여난 노년은 충분히 여유롭고 아름답다. 청춘의 아름다운 빛에 취해 있던 중년들은 이 사실을 모를 뿐이다. 그러니 젊음에, 즐거움을 안기던 쾌락의 뒷자락에 매달리지 말고 노년이라는 다음 단계를 향해 나아가라.

키케로는 ‘노년에 대하여’에서 이렇게도 말한다. “만약 연구와 배움을 가꿀 만한 소양이 있다면, 그 무엇도 한가한 노년보다 즐겁지 않다네. (…) 매일 새롭게 많이 배우면서 늙었다는 솔론의 말은 존중할 만하지. 어떠한 쾌락도 정신적인 즐거움보다 더 크지 않다네.”

품질 좋은 와인, 햇볕 말고 냉기도 필요

청춘은 좋은 학벌, 훌륭한 일터와 세상의 인정, 부와 명예, 짜릿한 사랑을 좇는다. 이런 모습은 자연스럽다. 그들에게서는 봄에 나무들이 더 많은 햇빛과 양분을 찾아 뿌리와 줄기를 한껏 뻗는 듯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하지만 가을의 나무와 같은 중년들도 이래야 할까? 가을은 겨울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다. 주변과의 경쟁에서 앞서려 하기보다, 추위를 이겨낼 내면의 옹골참을 키워야 할 때다.

키케로는 충고한다. 젊은이의 죽음은 비극이다. 한편, 노년의 죽음은 자연스레 찾아오는 인생의 과정이자 완성일 따름이다. 대부분 청춘에게 죽음은 머릿속에 없다. 너무 먼 미래의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반면, 중년은 애써 죽음을 외면한다. 인생의 봄과 여름을 겪은 그들에게 겨울은 아직 몰락과 소멸로만 느껴지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차분히 숨을 고르며 살아온 삶에서 눈을 돌려보라. 그리고 다가올 죽음을 바라보자. 죽음이 내 인생의 훌륭한 완성이 되려면 인생 후반기에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키케로는 계속해서 말한다. “모든 결점은 좋은 성품을 만드는 노력으로 달콤해진다네. 세월이 흐른다고 모든 포도주가 다 시어지지는 않지. 인생 역시 그렇다네.”

강렬한 햇살만 계속 받는 포도주가 상태 좋을 리는 없다. 품질 좋은 와인이 되려면 서늘한 냉기에서 숙성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오십, 반백의 세월도 그래야 한다.

‘키케로의 노년에 대하여’

‘키케로의 노년에 대하여’


“배우가 연극의 모든 막에 등장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젊음을, 불같은 사랑을 놓아버리지 못할까? 비아그라로 움츠러드는 성적 능력을 감추며, 진한 화장으로 짙어지는 주름살을 감추려 할까? 사춘기는 몸의 변화와 함께 찾아든다. 웃자란 키와 변하는 호르몬은 영혼의 균형을 흩트려놓는다. 삶의 후반기에 찾아드는 갱년기, 즉 사추기(思秋期)에도 그렇다. 성호르몬이 바뀌며 체력도 근력도 예전 같지 않다. 오십인 그대가 마음을 잡지 못하는 이유다.

사춘기 때 우리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이럴 때 세상은 마땅히 나아가야 할 표준 인생 진도표를 보여줬다. 학생이라면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 했다. 졸업 뒤에는 일자리를 찾아야 할 테고, 이후에는 사랑과 가정을 가꾸며 안정된 삶의 이력을 가꿔야 했다. 이런 인생 스토리를 때로는 받아들이고 때로는 밀쳐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의 인생 전반기는 세상이 꾸려놓은 진도표를 중심으로 굴러갔다. 하지만 사추기에 이르러 불안한 오십들은 어떤 표준적인 삶의 이야기를 따라야 할까?

인생 후반부의 방향이 초반부와 같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청년에게는 많은 관심과 기대가 쏟아진다. 그들은 마땅히 어떤 사람이 돼야 한다는 조바심, 주변의 바람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실망과 분노로 힘들어하곤 한다. 노년으로 향해가는 우리 중년은 어떤가? 세상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아예 내가 괜히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있기를 바라는 듯도 싶다. 회식 자리에서 중년인 내 옆자리에 앉기를 한사코 피하는 사람들 모습을 생각해보라. 이런 처지에 실망할 이유는 없다. 이 또한 자연스러운 삶의 변화일 뿐이다.

키케로는 조언한다. “배우가 연극의 모든 막(幕)에 등장할 필요는 없다.” 나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사라진다는 사실은 되레 기뻐할 일이다.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은 인생 후반부의 과제는 ‘개인화’라고 했다. 세상이 원하는 틀에서 벗어나, 오롯한 자기 자신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스무 살 젊은이의 남다른 꿈은 부모의 근심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순(耳順)을 넘은 자의 일상이 남들과 다르다고 걱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니 노년으로 향해가는 오십들은 이제 세상의 눈치에서 벗어나, 자기다움을 찾아나가야 한다.

융은 약해지는 욕정은 정신의 삶으로 나아가라는 신호라고 했다. 육체로만 봤을 때 중년은 점점 쇠약해지는 과정이다. 반면, 정신으로 봤을 때 중년은 더 지혜로워질 시간이다. 영혼의 발목을 잡던 강한 욕망에서 이제야 벗어나고 있지 않은가! 이런데도 왜 그대는 여전히 청춘의 욕망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가? 뭉개지는 외모와 떠나가는 젊음에 애달파하며 청춘에 꿈꿨던 연애 욕망에 또다시 매달리려 하는가?

“신께서 나를 어린이로 되돌리려 하신다면…”

“만약 신께서 노인인 나를 다시 어린이로 되돌리려 하신다면 나는 강력히 맞설 것이네. 진심으로 나는 다시 출발점에 서고 싶지 않아. 이미 결승점에 다다랐기 때문이라네.”

키케로의 말이다. 인생은 태어나서 나이 먹다가 죽음에 이르는 외통수 길이다. 뒤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잘 사는 인생은 과거를 곱씹지 않는다.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인생 과업에 힘을 쏟을 뿐이다. 중년의 공허와 불안은 노년이라는 새로운 단계를 준비하라는 신호일 뿐이다. 이는 청춘같이 사랑을 나눈다고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반백인 그대여, 지혜롭게 감정의 격랑을 이겨내시기 바란다.

안광복 서울 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반백철학: 교사이자 철학박사인 안광복이 오십 대에게 철학을 처방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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