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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룡에서 김진숙까지…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다

재미 역사학자가 쓴 잊힌 한국 여성 노동자들의 전투사 ‘체공녀 연대기, 1931-2011’
등록 2024-08-24 11:36 수정 2024-08-28 17:30


1991년 12월, 스물두 살이던 부산의 한 신발 대기업 미싱사 권미경은 죽음을 택했다. 때는 1970·1980년대 눈부신 급성장을 이룬 부산의 신발산업이 신자유주의적 경제 재편에 따라 급격한 추락을 경험하던 무렵이었다. 권미경은 거의 매일 쓴 일기 등 전태일 열사만큼이나 많은 글을 남겼는데, 1991년 10월11일의 일기는 다음과 같다.

“노동강도가 갈수록 심해져간다. 신발산업 해외이전 문제까지 들먹여가며 아무것도 모르는 내 동료들을 그들은 희롱하고 있다. 몸이 쑤시고 저리고, 사람이 일을 그렇게 죽어라고 하는데 멀쩡하면 어디 사람인가 기계지. 억울하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도대체 내 동료들은 얼마나 더 밟혀야 일어설 것인가. 세상이 싫고 나 자신이 싫다.”

재미 역사학자 남화숙이 쓴 ‘체공녀 연대기, 1931-2011’(후마니타스 펴냄)은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사를 통해 시대를 조명한다. 고무노동자협의회의 주장에 따르면 1990년대 초 부산의 신발산업은 “부산 경제의 3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정점에 이르렀다. ‘저임금 여성 노동력’에 기반을 뒀기에 가능했던 눈부신 성장은 하청, 국외 공장 신설 등과 맞물려 그 끝을 보이기 시작했고, 남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스피드업(하루 종일 노동자들을 둘러싸고 화장실에 가는 시간까지 모든 움직임을 측정해 생산 기록을 압박하는 등 생산 속도를 높이는 여러 방식)이 이뤄졌다. ‘어제의 산업 역군’은 하루아침에 ‘갈 곳 없는 산업 쓰레기’로 전락했다. 특히 부산의 신발공장은 식민지기의 노무 관계가 잔재해 욕설·구타 등 노동조건이 열악했다.

“내가 그녀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일기에 썼던 권미경은, 어린 노동자가 관리자에게 심한 모욕을 당한 어느 날 왼쪽 팔뚝에 마지막 일기를 남기고 회사 건물 베란다에서 몸을 던졌다. 마지막 일기는 다음과 같았다.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마라.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고무노동자 권미경 열사에 대한 기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오픈아카이브

고무노동자 권미경 열사에 대한 기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오픈아카이브


동료의 죽음에 노동자들은 크게 동요했지만 부산 여론 전반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부산 지역 경제가 곧 죽게 생겼다’는 위기감이 노동자 인권 우려보다 우세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1930년대 평양과 비교해보면 파업 여성 노동자에 대한 사회와 언론의 태도 면에서 눈에 띄는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1931년 5월 식민지 조선의 일간지 동아일보는 평양에서 발발한 고무 노동자 파업을 보도했는데, 이때는 여성 고무 노동자 강주룡이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앉은 사진이 신문에 크게 실렸다. 제목은 “체공녀(공중에 머물러 있는 여자) 돌현!”이었고, 기사는 ‘체공녀 강주룡’의 말솜씨를 크게 칭찬하는 내용이었다. 그가 을밀대 아래 모인 평양 시민들을 상대로 공장 쪽의 잘못을 규탄하고 공장 노동자들의 참담한 노동 실상을 알렸다는 게 요지다. ‘옥상녀’ ‘을밀대의 여인’ ‘여투사’ 등 강주룡을 흥미진진하게 묘사했던 모습은 오늘날과 사뭇 다르다.

1931년 5월29일 평양 을밀대 지붕에 올라가 농성을 벌이는 강주룡. 한겨레 자료 사진

1931년 5월29일 평양 을밀대 지붕에 올라가 농성을 벌이는 강주룡. 한겨레 자료 사진


저자는 독립운동가이자 노동운동가였던 강주룡으로 시작해 2010년대 김진숙(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에 이르기까지 여성 노동자들의 전투사를 촘촘하게 복원한다. 특히 ‘대공장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의 노조 운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노동운동’을 두고 비정규직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고 있지 못하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 김진숙에 대한 기록은 현재진행형이다.

또 1960년대 중반 대부분 노조에 ‘남성 생계 부양자의 필요에 맞춰 임금을 책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잡히면서, 가정의 부양을 책임지는 여성 노동자들과의 임금 격차가 벌어졌다는 지적도 빠트리지 않았다. 남성과 달리 대체로 여성 임금에 대한 논의는 ‘가족 생활급’보다 ‘최저임금’ 문제와 긴밀히 연관돼 있었다는 설명이다.

서울대 국사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거쳐 미국 워싱턴대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저자는, 이 책으로 제임스 팔레 저작상(2023)과 존 페어뱅크상(2023)을 수상했다.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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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 어린 동생 고종에게 밀려 왕위를 놓친 형 이재면은 1910년 8월 일본에 나라를 팔아넘긴 ‘경술국적’ 중 한 명이다. 이완용은 친일 대가로 15만원을 받은 반면 이재면은 83만원을 받았다. 현재 가치로 치면 최대 830억원. ‘일제 강요로 친일은 부득이했다’고 주장하나 피해자일 수 없는 친일파 30명이 벌어들인 재산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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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에게도 감정이 있다. 이제는 학계 안팎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저자는 인간만이 감정을 가진 특별한 생명체인 것처럼 사고하던 50여 년 전부터 동물의 감정을 연구한 선도적 동물행동학자다. 2007년 ‘논란’의 초판을 펴낸 뒤 17년 만에 발간한 전면 개정판에서 반세기 연구 성과와 경험담을 추가해 동물권을 둘러싼 시대 격변사까지 담았다.


판토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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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이성애적 욕망을 다룬 17~18세기 영국 여성 작가들의 작품 모음집. 여성에게 정조를 강요하며 짓누르는 관습을 순순히 따르지만은 않은 인물들이 나온다. 애프라 벤은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글쓰기를 생업으로 삼은 영국 최초의 여성 전업 작가로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다.


허구의 철학
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전대호 옮김, 열린책들 펴냄, 3만8천원

저자는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2013) ‘나는 뇌가 아니다’(2015) ‘생각이란 무엇인가’(2021) 3부작으로 현대 철학의 최전선에 ‘신실재론’(Neuer Realismus)을 위치시킨 독일 철학자다. 그는 디지털 미디어가 범람하는 시대에 구성주의, 자연주의를 비판하며 새로운 인본주의를 강조해왔다. 이번엔 허구와 실재의 대립 문제를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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