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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아이돌 산업 네 가지 그늘

아일릿, 뉴진스 ‘카피’ 논란 … 시각 창작물 보상체계 부실 등 질문 던져
등록 2024-05-04 01:35 수정 2024-05-08 01:55
하이브를 이끄는 방시혁 의장. 하이브 제공

하이브를 이끄는 방시혁 의장. 하이브 제공


‘집안싸움’ ‘권력투쟁’ ‘경영권 분쟁’. 하이브(의장 방시혁)와 자회사 어도어 민희진 대표의 충돌을 두고 국내외 미디어에 나온 표현들이다. 하지만 이 표현들은 이번 충돌을 오롯이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임희윤 음악평론가는 하이브 사태에서 ‘갈등’에만 집중하지 말고 배경을 짚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시가총액 8조원이 넘는 하이브는 케이(K)팝 산업을 대표하는 ‘공룡’인 데다, 갈등 구도 그 자체로 아이돌 문화산업 전반에 던지는 시사점이 많기 때문이다. 임 평론가는 “이번 사건이 하이브 대 민 대표의 전선으로 프레임이 고착화하는 게 아쉽다. 그 이전투구의 경기장에 진흙이 튀고 있는데, 진흙의 성분 분석을 해볼 필표가 있다”며 “(이번 사건의 배경에) 최근 수년 사이 케이팝이 폭발적으로 우상향하며 성장을 이룬 문화계 버전 ‘한강의 기적’이 있었는데, 이런 성장이 만든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번 사태로 드러난 케이아이돌 산업의 그림자는 무엇일까.

고장 난 멀티레이블 작동 방식

먼저, 성공을 불렀던 ‘멀티레이블 방식’의 운영이 비정상적으로 작동하며 한계를 마주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멀티레이블이란 엔터테인먼트사에서 소속 아티스트를 담당하는 레이블을 각각 만들어서 음반 제작과 아티스트 관리를 맡는 사업 방식을 말한다. 미국 음악계에서 이미 자리잡은 방식이다. 국내에서도 점차 이 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하이브는 레이블을 자회사 형태로, 제이와이피(JYP)엔터테인먼트와 에스엠(SM)엔터테인먼트는 레이블을 회사 내 담당 본부 형태로 두고 있다. 이 방식에는 여러 장점이 있다. 엔터 회사가 한 아티스트 그룹에 ‘올인’하는 방식이 아니어서 위험을 분산할 수 있다. 다양한 스타일의 예술가 그룹 활동을 지원할 수도 있다. 각 그룹의 공백기도 상호 보완할 수 있다. 하이브에는 11개의 레이블이 자회사로 묶여 있다. 방탄소년단(BTS)을 관리하는 빅히트, 르세라핌을 관리하는 쏘스뮤직(2019년 인수), 세븐틴의 플레디스(2020년 인수), 뉴진스의 어도어(2021년 설립), 민 대표가 뉴진스와 유사한 콘셉트라고 주장한 아일릿을 관리하는 빌리프랩(2023년 지분 전량 인수) 등이다.

하이브는 인수합병을 통해 멀티레이블을 늘리는 전략으로 2020년 상장한 이후 콘텐츠업계의 공룡으로 성장했다. 2020년 하이브의 연결기준 매출은 7963억원, 영업이익은 1455억원이었는데, 3년 만인 2023년에는 매출 2조1781원, 영업이익 2958억원으로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하이브의 공격적 멀티레이블 전략은 성공의 핵심 요인으로 평가됐다. 2024년 2월에는 앞선 2023년 4분기 하이브가 분기별 최대 실적(분기 잠정 매출액 6086억원, 영업이익은 893억원)을 낸 것을 두고 한국투자증권의 <멀티레이블의 효과가 드러난 최대 실적>(안도영 연구원) 리포트는 “2023년은 멀티레이블 전략이 돋보이는 한 해였다. 다수의 라인업을 통해 BTS 의존도를 낮추고 투모로우바이투게더, 뉴진스, 르세라핌 등 저연차 라인업이 가파른 성장세를 보여줬다. 이후 데뷔한 보이넥스트도어, 앤팀, 투어스도 케이팝 팬덤 내 인지도를 빠르게 늘려나가고 있어 그룹별 매출 집중도가 계속 낮아질 것으로 전망한다”고 평했다. 멀티레이블 시스템의 존재로 한때 90%에 달하던 BTS 매출 의존도를 줄일 수 있었고, 멤버들의 입대로 BTS 단체활동이 중단된 상황에서도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해석이 나왔다.

하이브는 아티스트별 레이블을 여러 개 만들어 음반 제작·관리를 맡기는 ‘멀티레이블’ 운영을 한다. 뉴진스(어도어), 르세라핌(쏘스뮤직), 아일릿(빌리프랩), 세븐틴(플레디스) 등 그룹은 하이브의 서로 다른 자회사 레이블이 제작·관리한다. 사진은 뉴진스. 어도어 제공

하이브는 아티스트별 레이블을 여러 개 만들어 음반 제작·관리를 맡기는 ‘멀티레이블’ 운영을 한다. 뉴진스(어도어), 르세라핌(쏘스뮤직), 아일릿(빌리프랩), 세븐틴(플레디스) 등 그룹은 하이브의 서로 다른 자회사 레이블이 제작·관리한다. 사진은 뉴진스. 어도어 제공


KPOP에서 저평가된 미학적 가치

그러나 모든 것은 갈등이 드러나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이번 갈등 구도가 수면 위로 드러난 뒤 하이브가 제대로 된 ‘역할 정리’에 나서지 못하면서 멀티레이블이 기업 성장에 오히려 방해가 된 측면이 확인되기 시작했다. 방시혁 의장과 모회사가 일부 개입한 가운데, 레이블 간 과도한 경쟁구도가 생겼다는 것이다. 민 대표가 2024년 4월25일 기자회견에서 “밖에서 볼 때 (레이블 중) 누가 적자냐, 서자냐 하는 쓸데없는 논의가 나오게 된다”고 언급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를 두고 김영대 음악평론가는 “아일릿이 뉴진스를 카피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왜 다른 경쟁회사에서 취할 법한 ‘팔로워 전략’이 같은 모회사를 둔 자회사에서 일어나느냐 하는 것”이라며 “이런 상황을 하이브가 조율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비판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멀티레이블 방식이 장기적으로는 맞는다고 보면서도, 이 방식이 오래 유지되려면 각 레이블의 자율적 창작 요건을 보장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정재민 음악평론가는 “레이블은 최종 결과물을 내기 위한 과정이 독립적이어야 한다. ‘윗선’(모회사 또는 오너 등) 개입이 없는 게 이상적이다. 그래야 창의적이고 다채로워진다”고 말했다.

하이브와 민 대표의 논쟁은 엔터 산업에서 창작의 성과를 어떻게 측정하고 배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던졌다. 케이팝 산업은 고속성장을 했지만, 정작 창작 성과의 측정과 분배 논의는 미진했다. 특히 음악과 같은 청각 창작물에 대해서는 저작권료 등의 보상 체계가 잘 갖춰져 있지만, 아이돌 그룹의 콘셉트를 만든다거나 어떤 안무를 짤 건지, 어떤 뮤직 비디오를 제작할 건지 등을 총괄하는 시각적·미학적 창작물에 대한 보상 체계는 잘 갖춰져 있지 않아 언제든 갈등이 일어날 수 있는 구조였던 셈이다. 이번 갈등에서도 민 대표가 아일릿이 뉴진스의 콘셉트를 베꼈다고 주장하고, 이 과정에서 뉴진스 역시 다른 아이돌 그룹을 참고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설왕설래가 오갔다. 민 대표가 하이브로부터 받은 보상이 충분한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이런 부분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까닭이다. 임희윤 평론가는 “지금까지 케이팝은 제왕적 리더십의 청각 크리에이터(이수만, 박진영, 양현석, 방시혁씨 등)가 주도했다. 근본적으로 시각 창작에 대해 크레디트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다. 청각 창작물(음악)은 저작권료 등 보상 체계가 잘돼 있지만, 시각 창작물은 그런 보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안무, 뮤직비디오도 마찬가지”라며 “케이팝 장르에서 시각 이미지가 갈수록 중요해지는데, 시각 창작자의 불만이 누적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영대 평론가도 “케이팝에서 미학적 부분이 저평가된 것은 사실이다. 뉴진스를 평단에서 높게 평가하는 이유에도 미학적 영역이 있었다. 이런 대목의 가치를 어떻게 온당하게 평가할지에 대한 언급을 민희진씨가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이브 자회사 쏘스뮤직 소속인 르세라핌. 하이브레이블즈 유튜브 갈무리

하이브 자회사 쏘스뮤직 소속인 르세라핌. 하이브레이블즈 유튜브 갈무리


충성고객 소비에 기댄 시장 왜곡

민 대표는 기자회견에서 “업계에서 음반 랜덤 포토카드를 만들고 밀어내기 같은 X 좀 안 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이는 케이팝 그룹의 앨범 판매 구조가 비정상적으로 왜곡된 고질적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이 문제 역시 엔터 업계 관계자 다수가 알면서도 애써 외면해온 이야기다. 최근 아이돌 그룹의 앨범은 음반마다 무작위로 그룹 특정 멤버의 포토카드 등과 같은 구성품을 다르게 넣어서 판매한다. 팬들이 원하는 포토카드를 구하려면 여러 장의 앨범을 사야 한다. ‘음반 밀어내기’ 또한 최근 극심해졌다. 앨범 유통사와 판매사가 새로 나온 아이돌 그룹 앨범의 초동 판매량(앨범발매일 기준 일주일 판매량)을 대규모로 매입하고, 이 물량을 팬 미팅에서 판매해 소진한다. 각 아이돌 그룹의 성과로 측정되는 초동 판매량 지표를 늘리기 위해서다. 결국 실제 판매된 것과는 다르게 편법을 쓰는 셈이다. 밀어내기 물량을 소화하기 위해 음반 판매만을 위한 팬 미팅이 많아지고, 음반시장 지표는 왜곡된다. 신현우 디지털문화연구자는 “기업은 아이돌이 상품화된 것처럼 팬덤도 상품으로 보는 것이다. ‘충성고객’이니 즐길 거잖아’라며 ‘우리는 이 정도 소비 문법을 만들 수 있고, (팬들은) 따르라는 식’”이라고 지적했다. 김도헌 음악평론가는 “케이팝 성장에 팬들의 충성소비를 배제할 수는 없다. 이 과정에서 다량의 음반을 구매하는 팬들의 부담이 점점 커진다”며 “이런 구조가 만연했다면 조사를 하고, 재발 방지 대책이 필요하다. 기획사 입장에서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경쟁력 갉아먹는 ‘무한경쟁’

전문가들은 획일화된 콘셉트와 마케팅의 ‘성공 방정식’에만 매몰돼 무한경쟁을 하는 지금 같은 구조는 결국 케이팝의 경쟁력을 갉아먹을 수 있다고 말한다. “기획사 간의 판매 기록 대결을 서로 부추기고, 끝없이 경쟁하는 이런 구조를 근본적으로 돌아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케이팝이 변방의 서브컬처로 시작해 세계 주류를 위협하는 흐름이 되었지만, 1980년대 홍콩 누아르의 예를 참고해야 한다. 홍콩 누아르는 (인기를 끌었지만) 장르적 클리셰를 반복하다 저문 사례다. 지금의 케이팝은 색깔의 다양화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성공 공식’을 답습하며 규모로 경쟁한다. 계속해서 (지금처럼) 성장하는 ‘기적’을 일으켜야 하는 시스템이다. (이대로는) 단기간 우리가 가진 역량을 소진하고 빠르게 세계 무대에서 밀려날 수 있는 결과로 가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임희윤 평론가의 지적이다.

박준용 기자 juney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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