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꽃이 없다고 방 안에 틀어박혀 한숨을 내쉴 필요는 없다. 마른 넝쿨이 질서 없이 우거진 곳을 지나가다보면 꽃보다 진기한 박주가리 씨앗을 만날 수 있다. 이보다 우아하게 비행하는 생명체가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고운 깃털을 달고 둥둥 떠다니는 박주가리 씨앗 말이다. 이 추위에 방한 장비도 없이 저토록 자유롭다니. 그 모습은 꼭 발레리나의 착지를 몇 배속으로 느리게 보는 것처럼 환상적이다. 햇빛이 씨앗 깃털에 내려앉기라도 하면 너무 반짝반짝해서 마치 시냇물에 봄볕이 닿아 환하게 부서지는 것만 같다.
초겨울부터 박주가리는 제 열매를 쪽 하고 열어 그 안에 든 씨앗을 떠나보낸다. 전보다 더 추워지고 건조해질수록 모체에서 떨어져 나오는 씨앗이 많아진다. 이들 씨앗 하나를 말할 때 ‘수과’라고 한다. 먼 곳으로 날아가기 위해서는 자꾸만 더 비워야 하는 걸까. 여윌 수(瘦), 과실 과(果). 이름 그대로 파리하게 여문 박주가리 수과에는 더 잘 날기 위해 민들레처럼 솜털이 달려 있다. 그 솜털은 민들레 씨앗보다 더 크고 더 길고 더 반짝인다.
씨앗을 흩어 퍼뜨리기 위해 씨앗에 달린 부속 장치와 그것이 하는 역할을 통칭해서 식물분류학 용어로 디아스포레(diaspore)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어 ‘파종’에서 비롯됐는데,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 혹은 이주 그 자체를 의미하는 디아스포라와 어원이 같다. 식물은 저마다 다양한 디아스포레 전술을 써서 종을 유지하고 개체의 영역을 확장한다.
단풍나무처럼 프로펠러를 달아 속도를 좀더 내거나, 마삭줄처럼 팽그르르 돌아서 곧장 땅으로 내리꽂히는 화끈한 방식도 있다. 때로는 동물을 이용하기도 한다. 제비꽃이나 며느리밥풀 종류는 씨앗에 ‘엘라이오솜’이라는 달콤한 부속체를 붙여서 개미를 꼬드긴다. 그러면 개미는 엘라이오솜이 붙은 씨앗을 통째 들고 옮겨다니며 엘라이오솜만 먹고 씨앗은 남긴다. 식물로서는 그야말로 성공적인 산포가 이뤄지는 것이다. 산딸기 종류처럼 아예 씨앗을 과육질로 둘러싸서 동물 몸속으로 들어가는 전략을 쓰기도 한다. 동물의 따스한 내장을 통과한 씨앗은 대체로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발아력이 높아진다. 흩어 퍼뜨리기 전술이 무엇이냐에 따라 식물은 다양한 형태의 수과를 갖게 된다.
눈이 내렸다가 그쳤다가 반복하는 겨울, 박주가리는 솜털을 단 씨앗을 퍼뜨리며 한창 ‘디아스포라’를 하고 있다. 한 알의 씨에 달린 그 솜털이 말 그대로 새의 깃 같아서 내가 붙인 애칭은 ‘씨앗깃’이다. 그런데 어쩐지 앞서 언급한 화려한 종자 산포 전술에 비해 박주가리는 느긋하고 평안해 보이기까지 한다. 어떤 의도로 특정한 땅에 가닿으려는 건 아닌 것 같고 더 많은 땅을 점령하려는 목적도 아닌 것 같고 본토에서 쫓겨난 건 더더욱 아닌 듯하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다만 겨울바람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어떤 목적지를 정해놓고 출발하는 게 아니라, 자유로운 여행자처럼 또는 어딘가에 자신을 온전히 맡긴 순례자나 수행자처럼.
박주가리. 열매 모양이 박을 닮았고 쪽 하고 갈라진다고 해서 박조가리가 변해 박주가리가 됐으리라 짐작한다. 박보다 작다고 새의 박이라는 뜻에서 민가에서는 ‘새박덩굴’이라고도 부른다. 꽃도 박꽃과 비슷하다. 한껏 축소한 듯이 미니어처 박꽃 여러 개가 다닥다닥 모여 핀 것 같은데 뭔가 좀 신령스러운 데가 있다. 박꽃처럼 흰색이 바탕을 이루기는 하나 핑크 잉크 한 방울이 실수로 번진 듯한 옅은 분홍빛이 있다. 꽃부리 가장자리는 일부러 마감 바느질을 하지 않고 풀어놓은 식으로 연출한 레이스 같다. 줄기 마디에서 꽃줄기가 나와 여러 송이가 뭉쳐서 핀다. 그 꽃뭉치 가까이 가면 은은한 향기가 난다. 좀더 자세히 관찰하면 암술과 수술이 한꽃에 모인 양성화도 있고 수꽃만 피는 꽃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수꽃 개수가 훨씬 더 많은 이유는 꽃가루를 최대한 많이 만들 요량인 것. 이런 방식으로 꽃을 피우는 걸 두고 식물분류학에서는 양성웅화동주형(兩性雄花同株型)이라는 난해한 용어를 쓴다. 광활한 자연에서 식물의 생식체계는 워낙 다채로워 양성화, 단성화, 암수한그루, 암수딴그루 등으로 단정해서 말하기가 무척 어렵다. 정말 깊이 들여다보고 관찰해야지 겨우 이해할 수 있다.
그러기에는 꽃 피는 시절 참 금방 지나간다. 하지만 오래 기억된다. 박주가리 꽃이 얼마나 예쁘게 피었던가를 떠올린다. 한여름 박주가리 꽃이 필 때가 되면 여름방학이 찾아왔다. 줄기며 잎이며 가리지 않고 몸 전체에서 박주가리는 상처가 나면 흰 우유 같은 액체를 낸다. 그 특징 덕분에 나는 박주가리를 일찍부터 알아봤다. 그걸 하얀색 매니큐어라며 손톱에 칠하고 놀았다. 봄에 노란 꽃 피는 애기똥풀은 꺾으면 노란 즙이 나온다. 우리 할머니한테 배운 식물놀이인데 요즘에는 내가 조카한테 알려준다. 노란 매니큐어는 애기똥풀, 하얀 매니큐어는 박주가리.
박주가리와 유사한 혈통의 식물을 한데 묶어 영어권 국가에서는 밀크위드(Milkweed)라고 부른다. 식물이 특정 목적으로 체내에서 만들어 몸 밖으로 내보내는 액체를 ‘유액’이라 한다. 그건 어떤 신호다. 독이 있다는 것. 상처를 입으면 나오는 흰색 유액이 바로 박주가리가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이다.
박주가리는 덩굴식물이다. 대체로 덩굴식물은 다른 식물체를 감기 위한 특별한 수단을 만들기 마련이다. 돌콩이나 새콩처럼 덩굴손을 내거나, 환삼덩굴처럼 갈고리 같은 가시를 내서 어디든 엉겨들거나, 담쟁이덩굴처럼 흡착판을 써서 어디 딱 달라붙는다. 다래덩굴처럼 힘이 워낙 세서 올라탄 식물을 완전히 제압하는 방식도 있다. 그렇게 덩굴식물은 식물 세계에서 생존하려 지난한 과정을 거친다.
박주가리가 요란한 장치나 유별난 행위 없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가만히 새하얀 독을 몸 안에서 만들기 때문이다. 식물의 독은 인간이 어떻게 정제하냐에 따라 약이 될 때도 있다. 한방에서는 박주가리 혈통의 식물을 약으로 널리 쓴다. 그중 하나가 백수오로 널리 알려진 ‘큰조롱’이라는 식물이다.
자잘한 꽃 크기에 비해 박주가리의 열매는 큰 편이다. 내 주먹 정도 될까. 양 끝이 뾰족해서 전체적으로 길쭉한 박 모양이다. 표면은 오돌토돌하고 여주를 닮은 것도 같다. 푸르스름하게 설익은 열매는 먹기도 한다. 과육이 물기를 머금어 아삭하며 들큼한 맛도 난다. 박주가리는 포식자를 유혹하겠다는 의도가 없는 것일까. 포식자가 더 먹고 싶다는 욕심이 안 나도록 맛을 조절한 것일까. 그럼에도 나는 그 밍밍한 맛을 해마다 한 번은 느끼고 싶어서 박주가리 열매가 맺히기 무섭게 껍질을 벗겨 먹어본다. 조금이라도 더 익으면 씨앗에 물기가 빠져 텁텁해진다. 열매가 익을수록 과육의 물기는 빠지고 그 자리에 털이 빼곡하게 차기 때문이다.
다 익은 열매는 일부러 쪼개지 않아도 알아서 두 쪽으로 나뉜다. 마치 돛단배 두 척이 마주 보는 모양으로. 갈라진 양쪽에 털 달린 종자가 여남은 개씩 차곡차곡 들어 있다. 바람이 몽땅 앗아가기 전에 그 털을 모아 우리 선조는 면사 대신 썼다는 이야기를 민속식물학을 전공한 선배에게 들었다. 겨울 보온재로 솜 대신 사용하거나 도장밥과 바늘 쌈지를 만드는 데도 활용했다고. 박주가리는 전국 어디서나 자란다. 밭두렁에 드넓게 퍼지기도 하고 큰 나무, 작은 나무 구분 없이 감고 오르기도 한다. 전봇대와 울타리를 타고 오르는 기술은 특히 대단하다.
전국 어디서나 이 무렵 유유히 떠다니는 박주가리 씨앗을 보면 내가 지금 박주가리 주변을 지나가고 있음을 안다. 애써 찾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은 어디에나 있다. 지금의 작은 씨앗 하나를 내보내기까지 박주가리는 부단히 애썼을 것이다. 열매가 두 쪽으로 벌어지고도 그 씨앗이 단단히 여물기를 신중하게 기다렸으리라. 씨앗이 깃에만 의지하지 않도록 최대한 가벼울 수 있게끔 혹독하게 단련했으리라. 그러고서야 깃을 정비하고 겨울바람을 기다리고, 무엇보다 그 바람을 온전히 믿었을 것이다.
그렇게 박주가리 모체에서 씨앗은 분리된다. 그것이 어떤 이별임을 이미 안다는 듯이 떠나간 씨앗은 결코 돌아보는 법이 없다. 박주가리 씨앗의 이동을 ‘출가’라고 불러보면 어떨까. 특정 수행자에게 한정되는 게 아니라 모든 집착과 얽힘에서 벗어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출가라던 법정 스님의 법문처럼, 박주가리 씨앗은 깡마른 채 가느다랗고 길고 촘촘한 깃을 펼치며 말한다. 진정한 자유는 내적 절제에 있다고, 그걸 품기 위해서는 거듭된 자기 점검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해낸다. 정말 먼 곳으로 가서 더 넓은 땅에 내리는 그 거룩한 일을.
씨앗이 다 떠나간 열매는 껍질만 남은 채 덩그러니 덩굴에 매달려 있다. 내 눈에는 그게 꼭 포유류의 텅 빈 자궁 같다. 실제 그렇기도 하다. 동물의 난자와 같은 기능을 식물에서는 밑씨가 하고 그 밑씨를 보호하는 씨방이 자궁과 같으니까. 내가 떠나온 고향 마을에서 혼자 사는 엄마 생각이 나서 부쩍 쓸쓸해진다. 씨앗을 품고 키우고 깃을 달아 세상에 훨훨 내보내는 일. 그건 작별인 동시에 또 다른 만남을 희망하는 일이리라. 뿌리를 깊이 내리고 박주가리는 한 장소에서 오래 산다. 그냥 버티는 게 아니라 계속 자라서 더 큰 무리를 만든다. 씨앗을 멀리 떠나보낸 모체는 봄이 오면 다시 싹을 틔울 것이다. 그 뿌리는 더욱 굵어질 것이다.
글·사진 허태임 식물분류학자·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연재 소개: 식물학자가 산과 들에서 식물을 통해 보고 듣고 받아 적은 익숙하지만 정작 제대로 몰랐던 우리 식물 이야기.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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