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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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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누구든 누구를 사랑하든 ‘축복’하노라

소수자를 공동체에서 배척하는 교회의 권위와 권력으로서 ‘축복’ 행위를 봉사와 헌신, 선물의 의미로 전환한 교황청 선언
등록 2023-12-30 06:29 수정 2024-01-03 01:59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 모인 신자들을 향해 손짓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 모인 신자들을 향해 손짓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2023년 12월18일(현지시각) 로마 교황청이 역사적 선언을 발표했다. ‘간청하는 믿음’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 문헌은, 결혼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수정하거나 변경하지 않는 더 넓은 범주에서 동성 커플이나 정규적이지 않은 상황에 있는 커플을 축복할 수 있다고 밝혔다. 즉, 결혼은 여전히 가족을 결성하기 위한 이성 간 결합이며 교회의 공식 의례는 그 경우에 국한돼야 하지만 축복(blessing)은 그보다 넓은 의미의 맥락에서 바라보고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 문헌의 기본 선언이다.

 

‘결혼은 이성끼리’ 교리는 변함없지만

 

이 선언은 즉각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진보 진영은 결혼을 여전히 이성 간 결합으로 못박은 것에 아쉬움을 표하고, 보수 진영은 그들의 시각에서 ‘죄’에 해당하는 동성 커플을 축복하는 것을 비성서적이라고 반발한다. 세속적 언론들은 로마 교황청이 축복을 동성 결합으로 ‘확장’한 선언이라고 보도했다. 실천적으로는 로마 가톨릭 사제들의 판단에 따라 교회의 공식적 성사와 의례 바깥에서 축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삶에서 축복의 위치가 환대와 더불어 결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세속적인 문화연구자의 입장에서는 이 선언의 의미를 ‘확장’보다 ‘전환’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훨씬 더 획기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축복의 대상에서 배제됐던 사람들을 고전적 의미의 축복에 포함한 것이 초점이 아니라, 축복하는 자와 축복을 구하는 자의 관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화 의례적 관점에서 본다면 사람의 생애주기는 환대로 시작해 축복으로 마무리될 때 ‘인간적’인 것이 된다. 사람은 환대를 통해 사람(人) 사이(間)로 안전하게 들어가고, 축복을 통해 사람 사이를 빠져나와 자신감을 가지고 다른 사이로 들어가게 된다. 환대는 나를 해할지도 모르는 낯선 사이로 들어갈 때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문화적 의례이며, 축복은 나를 환대하던 사람들을 떠나 다시 낯선 사람 사이로 들어갈 때 용기를 북돋우는 의례 행위다. 환대와 축복 모두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홀로’가 아닌 ‘사이’로 맞이하게 한다는 점에서 ‘인간적’이다.

그렇기에 학교의 경우 입학식과 졸업식에 많은 공을 들인다. 새로운 학교에 들어가는 것만큼 설레지만 또 두려운 일이 어디 있는가? 그래서 입학식은 여기에 있는 모든 이가 너를 따뜻하게 맞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환대는 자기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큰 기쁨이 되고 그 공동체에서 살아갈 용기를 불어넣는다. 이 때문에 대안학교나 혁신학교는 입학식과 아울러 ‘개강맞이’ 혹은 ‘등교맞이’에 정성을 다한다. 이미 실패와 배제의 경험이 있는 이들이 여기를 자기 공동체로 생각하도록 마음을 돌리게 하는 멋진 의례다.

축복은 반대로 떠나는 사람을 향해 용기를 갖도록 북돋우는 행위다. 졸업식은 그저 이별의 의례가 아니다. 이 학교에서 지난 시간 동안 죽지 않고 살아 그 과정을 다 이수한 것만으로도 너는 이 장소를 떠나 밖으로 나가서도 충분히 잘 살아가며 나아가 기여할 수 있다는 확신과 용기를 북돋우는 것이 축복이다. 나 홀로 세상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껏 함께한 이들의 힘(그들 속에서 성장한 힘)과 함께 떠나는 것이 바로 축복이다. 영화 <스타워즈>의 저 유명한 대사처럼 말이다. 포스가 함께하기를!(May the force be with you!)

 

환대와 축복,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행위

 

이처럼 환대와 축복은 사람이 낯설고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나 그곳으로 떠날 때 반드시 생길 수밖에 없는 두려움을 대면하고 극복하는 우리 인간종의 가장 문화적인 해법이다. 환대와 축복 가운데 있을 때 비로소 사람이 된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쓴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의 주장을 확대한다면, 환대와 축복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었고 인간으로 살아가게 한다. 두려움을 ‘홀로’의 문제만으로 내버려두지 않고 ‘사이’와 함께 해결을 도모하는 것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환대와 축복의 메시지는 같다. “두려워 말라. 너는 타인의 자비(mercy)를 가득히 받은 이다.”

이를 환대와 축복을 청하는 사람의 입장으로 보면, 환대와 축복은 개인적 약함이나 강함과 상관없이 인간으로서 본질적인 것을 갈구한다는 말이 된다. 자신을 인간으로 구원하는 초월적 존재의 현존(교황청 표현에 따르면 God’s saving presence in his life)을 인식하는 인간적 약함을 고백하는 것이 환대와 축복을 청하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축복은 사람의 ‘인간됨’ 본질과 관련됐지 잘 먹고 잘살게 복을 내려달라는 기복 행위와는 거의 상관없다.

바로 이 점에서 환대와 축복은 무서운 권력이 된다. 사람을 인간으로 받아들일 수도, 비인간으로 만들어 내칠 수도 있는 무서운 행위가 환대와 축복이다. 누구를 환대하고 축복할지 정하는 권력은 곧 인간의 생사여탈에 대한 권력을 가지게 된다. 환대와 축복이 그저 따스하고 자비로운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배제하고 포함하는 것을 통해 사람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정치적 권력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환대와 축복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된 자를 ‘호모 사케르’라고 불렀다. 호모 사케르를 죽여도 아무도 처벌받지 않지만 동시에 호모 사케르는 신의 제물로도 바칠 수 없는 존재였다. 누군가를 호모 사케르로 선언한다는 건 그 누구도 그의 존재를 환대해서도 축복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환대받고 축복받는다면 그 사람은 적어도 그 관계에서는 ‘인간’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명에게 인간이라면, 나머지에게도 인간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에 그는 아무나 죽여도 되지만 누구도 환대하거나 축복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을 것이다.

권력의 입장에서 호모 사케르보다 더 위험한 자가 호모 사케르를 환대하고 축복하는 이들이다. 축복과 환대는 결코 인간일 수 없는 호모 사케르 개념을 근본부터 부정하고 위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모 사케르를 환대하고 축복하는 이들 역시 호모 사케르가 되어 공동체로부터 말소돼야 했다. 나아가 이런 사람들이 등장할 수 없도록 축복과 환대는 엄격히 권력의 통제 아래서 공식적으로만 행해져야 했다. 그래야 권력을 완벽하게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황청의 이번 선언은 바로 이 권력으로서의 환대와 축복을 헌신으로 바꿔놓는다는 점에서 대상의 확장이 아닌 획기적 전환이다. 선언에서는 축복의 공식 의례적 위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을 놓는 순간 권력체로서 교회가 붕괴하기 때문이다. 선언에서도 솔직하게 교회가 이 근간을 바꿔놓을 공식 의례상의 축복을 부여할 권한이 없다고 말한다.

 

‘누구를 축복할 것인가’ 결정하는 권력

 

그러나 교황청은 동시에 축복의 의미와 가치를 “부정하고, 거부하고, 배제하는 재판관이 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환대와 축복이 권력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축복은 교회의 권위와 권력을 행사하는 공식 의례에서 벗어나는 헌신/봉사의 행위로 평가돼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환대와 축복이 권력으로만 기능할 때 반드시 수반될 수밖에 없는 엘리트주의에 빠지는 것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환대와 축복의 대상을 검사·검증한다며 에너지를 다 낭비해버리는 나르시시스트·권위주의적 행위를 뜻한다.)

바로 이 점에서 이 문헌은 축복과 환대에 대한 관점을 다시 한번 전환한다. 축복과 환대는 ‘교환’이 아니라 ‘선물’이라는 것이다. 축복은 내가 축복받을 자격인 도덕적 완벽함의 대가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교황은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 어떤 조건도 없이 모두에게 가능한 것으로서 축복을 제안한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축복은 이 문헌의 초기에 밝히는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기도 하며 끊임없이 흘러가고 순환한다. 교환이 아니라 선물로 엮여 반복되고 끊기지 않고 연결돼 흐르는 환대와 축복의 연결망이 형성된다. “우리 모두는 축복받을 수 있고 축복할 수 있다.” ‘선물론’ 관점에서 본다면 세계를 구축하고 지속시키는 것은 교환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진 환대하고 축복하는 선물의 힘이다.

사실 이 문헌 이전에 내게 환대와 축복이 인간됨(humanity)의 핵심에 있다는 것과 세계를 구축하고 지속하는 선물론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이 있다. 얼마 전 감리교회에서 출교(excommunication)당한 이동환 목사다.(제1494호 ‘목사가 사람을 축복한 것이 회개할 일일까’ 참조) 그는 오래전 나와 나눈 대담에서 축복은 복을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복이 그에게 머물기를 간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목사에게는 복을 내릴 권력은 없으며 복을 내리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뿐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목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죄인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 축복을 갈구하는 이에게 하느님의 은총/자비가 있기를 빌어주는 것뿐이라고 했다.(제1440호 ‘저주의 시대에 맞선 축복의 언어를 배워라’ 참조)

누군가는 그가 신의 뜻을 인간이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자’이기 때문에 목사 자격이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그와 대담하며 발견하고 감탄한 것은 목회를 대하는 그의 자리가 철저하게 윤리 실천적이라는 점이었다. 즉, 인식론적으로 불가지론자이기에 죄에 관한 판단을 회피/유보하고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뜻을 알기에 오히려 목회자 자리인 윤리 실천의 위치를 철저히 견지하며 축복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안타깝게도 지구 반대편에서 어느 조직보다 보수적인 로마 가톨릭교회가 스스로의 권력을 조금은 봉사의 자리에 내주고 확장하는 역사적 문헌을 발표한 시점에 이동환 목사는 출교당했다. 출교는 말 그대로 모든 사이를 끊어버린다는 말이다. 호모 사케르를 환대하고 축복해 교회 권력을 위태롭게 한 자이기에 호모 사케르로 선언한 것이다. 누구든지 그를 모욕하고 죽이더라도 그것은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이다.

 

‘성소수자 축복’ 목사를 출교한 한국 교회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아닌가? 바로 예수를 유대인에게 넘긴 빌라도가 한 말이다. 나와 상관없다고 말이다. 자신은 상관없다고 말한 그 빌라도는 사도신경에 박해자로 영원히 박제됐다. 예수의 죽음에 책임져야 하는 가장 상관있는 자가 됐다. 아마도 같은 역사가 반복될 것이다. 교회는 이동환 목사에게 앞으로 벌어지는 일이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겠지만, 이제부터 이동환 목사에게 벌어지는 일이야말로 교회 손에 일어난 일이 될 것이다. 이는 축복일까 저주일까. 세속적 인간이라 그만 이 글은 마지막이 저주가 되는 것 같지만, 이동환 목사라면 그들에게 축복의 기도를 전할 것 같다. 그게 자기 자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그에게 포스가 함께하기를!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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