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는 언제나 그것이 타자의 시선(임)을 보증한다. 여행이라서 허용되는 ‘무지’가 있다. 한편 여행이기 때문에 노출되는 이 무지의 감각은 대상에 대한 관습과 신비를 동시에 깨기도 한다. 게다가 가이드가 있는 단체 이동인 경우, 눈앞의 전시와 미술관이 흘러가는 대로 동선이 짜인다. 2023년 11월17일부터 20일까지, 30도 더위에 몸을 맡긴 필자는 약간의 수동성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전시장에만 들어가면 눈을 (반짝) 떴다. 그만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동시대 미술의 아트페어와 몇몇 전시장이 보여주는 장면이 신선했다.
누구의 관점에서 자카르타의 아트페어와 미술현장이 신선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렇게 쓸 순 있다. 이곳은 계절과 기후의 감각부터 다르다. 적도에 가까운 자카르타는 인도네시아 수도로 고층 빌딩과 낮은 지대의 주거지역이 혼재돼 있다. 오른쪽으로 고층 빌딩들이 이어지고 왼쪽으로 낮은 지붕의 집들이 이어진다.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는 듯한 나무와 풍경, 새를 파는 가게와 독특한 구조물의 좌판대가 공존한다.
스테레오타입으로 종종 등장하는 바이크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거리를 꽉 채웠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엄마와 아빠 사이에 꽉 끼어 앉은 어린이나 반려동물 등의 모습이 참으로 안정적으로 보였다. 앞뒤로 밀착해 빠른 속도로 거리를 질주하는 아이들을 보는 경험이 이름을 알지 못하는 다양한 나무들, 갑자기 쏟아지는 비와 공존했다. 이 풍경 사이사이로 들어온 ‘현대미술’은 아트페어와 만나 동남아시아 지역의 여러 작가와 대화하고 있었다. 또 지역에서 얻은 나무·돌·사물 등의 천연 재료와 대중문화가 혼합돼, 여기 미술이 보여주는 장면은 다음 세대의 자카르타-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듯했다.
서울에는 첫눈이 왔다는 11월17일이었다. ‘바이크의 도시’로 알려진 자카르타는 언제나 여름이다. 그날부터 19일까지 자카르타 박람회장 지엑스포(JIEXPO)에서 ‘아트 자카르타’가 시작됐다. 전세계 어디나 그렇듯, 아트페어의 준비 기간은 길지만 페어의 시간은 언제나 짧다. 흰 가벽을 세우고 존(A·B·C)을 만들고 사람들이 만나는 게이트 등을 설계한다. ‘아트 자카르타’는 국제 미술을 다루는 아트페어다. 2023년에는 한국의 아라리오갤러리 등 6개 갤러리와 말레이시아, 대만, 필리핀 등 아시아 지역의 페어 60여 곳이 참여했다.
첫인상은 작품 규모가 크다는 것이었다. 전시장과 작가 컬렉티브(연대)를 통해 선보이는 작품들의 규모는 첫눈에 봐도 컸다. 물리적 크기 차원에서도 그렇고 몇몇 작품이 가리키는 사고방식이 대륙적인 호방함과 섬의 다양성을 포괄하는 듯했다. 각 작업이 보여주는 회화나 조각 매체에 대한 관념이 ‘그리기’와 ‘만들기’라는 동사와 더 밀접하게 관계하는 듯 보였다. 그러니까 서구 미술계와 현장이 싸우면서 쌓아온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담론과 결부되면서도 지역 특성을 강조한 작업이 많이 보였다. 굳이 현대미술이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태도랄까? 아트페어에 있는 작업들은 잘 짜인 테이블 위 음식이 아니라 시장의 과일상(좌판) 같았다.
인도네시아는 현대미술 관련 국공립, 지방자치단체 재단의 기반시설이 취약하다. 작가들의 작업을 지원하는 공적 프로그램이 거의 없고, 자카르타의 사립미술관도 한 곳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다른 도시인 족자카르타나 반둥 등에서 이뤄지는 미술작가와 큐레이터들의 독립적 활동 등은 익히 알려져 있다. 교육과 워크숍을 폭넓게 진행하는 컬렉티브 쿤치, 2022년 카셀 도쿠멘타를 감독한 아티스트 그룹 루앙루파도 인도네시아에서 시작했다.
2023년 아트 자카르타를 기획한 사람은 개인 컬렉터이자 기업가인 톰 탄디오다. 현대미술과 예술을 다루는 인식뿐 아니라 지원·행정 체제 부재를 한 개인 사업가가 맡고 있는 구조이다. 탄디오는 한국 현대미술 현장을 수년간 방문한 한국 현대미술 관찰자이자 협업자이기도 하다. 2016년 서울 송은아트센터는 그의 소장품으로 기획전시를 연 바 있다. ‘톰 탄디오–미술품 컬렉팅에 푹 빠진 남자: 사적 이야기로서의 컬렉팅’(Tom Tandio-The Man Who Fell into Art : Collecting as a Form of Personal Narrative) 전시였다.
톰 탄디오는 ‘로컬’(Local)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아시아 곳곳의 미술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세대의 작가들을 지원했다. 서울 전시공간을 찾아 다양한 대화를 나눴던 탄디오는 전시기획자인 필자에게 “미술시장은 큐레이팅이나 글쓰기와는 다른 곳이니 관심 갖지 말라”고 말할 정도로 유머러스하고 솔직하다. 미술에 대한 언어가 부족한 인도네시아에서 그가 아트페어를 택한 것은 점진적인 미션의 첫 단계라는 생각이 든다.
아트 자카르타 전시장에서 탄디오는 이렇게 말했다. “전세계 어디든 미술시장은 목적지향적인 곳이 맞는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처럼 현대미술 관련 제도가 없는 곳에서는 아트페어가 미술 관람을 비롯한 만남의 장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제부터 하나씩 미술관, 큐레이팅 교육 확산, 작가와 관객 교육 등이 필요하다.”
탄디오는 미술시장을 다루는 아트페어의 목적이 시장과 유통에만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글로벌한 조건’을 만드는 것임을 강조한다. 서구에서 출발한 아트바젤, 프리즈와는 다른 아트 자카르타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흥미롭고도 중요한 미션이다. 가격이 되는 작품보다 인도네시아의 지역적 정체성, 인도네시아 현대미술사를 서술하는 데 기반이 되는 작품과 동시에 젊은 예술가를 적극 지원하는 것이다.
사흘에 불과해, 치고 빠지는 ‘이벤트’로서의 아트페어는 자카르타와 범아시아 지역의 미술을 연결한다. 전시장에서 만난 일본 도쿄의 저널리스트 나쓰키 모루카는 “근래 본 아시아 지역 아트페어 중 가장 재밌다. 작품들이 어느 곳에 포섭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와 경향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아트 자카르타에선 ‘만지지 마시오’ ‘살 것 아니면 들어오지 말라’는 위엄을 찾아볼 수 없다. 탄디오의 말대로 페어인 동시에 미술관이고, 일종의 교육이 이뤄지는 워크숍 같은 풍경다. 미술품을 만지고 헤집고 다니는 자유(작품은 안전하게 보호된다)를 주는 것이 페어의 전체적인 분위기다.
물론 엄연한 아트페어로 부스 형태의 전시고, 전시된 작품을 판매하는 목적이 확실하다. 하지만 부스 형태를 벗어나는 여러 시도를 했다. 첫째, 부스를 이루는 흰 가벽을 넘는 작품의 전시 방식이었다. 그래서 수적으로 많은 회화나 드로잉이나 판화보다는 ‘웃자란’ 조각 작품이 눈에 띄었다. 특히 거대한 여신 조각상을 보여주는 자가드갤러리(Jagad Gallery)의 뇨만 누아르타 작가의 위엄 있는 작업이 인상적이었다. 종교적 특성을 보여주는 조각,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는 조각 등을 살필 수 있었다. 자연친화적이고 재생 가능한 재료에 애착이 느껴졌다.
둘째, ‘부스’의 경계를 넘어 전시 공간에 선보이는 작업의 특수성이다. 9개 작업이 ‘큐레이팅’돼 전시장 곳곳에 구성됐다. 인도네시아 갤러리인 ‘로 프로젝트’의 작가 파이살 하비비의 작업, ‘더 드로잉 룸’(The Drawing Room)의 필리핀 작가 호세 산토스의 작업은 시선을 아래위로 역동적으로 끌며 아시아 지역의 독창적인 재료 사용법을 살피게 했다. 기업 후원을 받은 신작들은 페어 부스 바깥에 배치돼, 관객의 동선을 수직·수평에서 원형으로 교란했다. 여러 부스를 기반으로 한 아트페어의 동선이 수직, 수평, 한 방향 또는 반대 방향의 화살표를 그린다면, 아트 자카르타의 몇몇 작업은 둘러앉아 볼 수 있는 형태가 됐다.
필자는 2023년 9월 서울에서 관객 9만 명을 끌어모은 프리즈 아트페어 등을 전시 기획 관점에서 살펴본 ‘2023 코리아 아트마켓 포럼’ 글에서 요즘 전시가 ‘공예적' 특성을 보여준다고 언급한 바 있다. 손으로 제작한 ‘물성의 감각’을 재소환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2023년 가을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강서경 작가의 전시, 2023년 프리즈 서울의 ‘아티스트 어워드’에 선정된 우한나의 작업 등에서 손으로 만들고 만지는 촉각이 작품 전반에서 드러났다.
아트 자카르타의 미술 역시 그야말로 생활의 예술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자카르타의 사랑받는 전시 공간인 ‘로 프로젝트’에서 열리는 일본 작가 케이 이마주의 개인전 ‘발굴하다’(Unearth)는 오늘날 현지에서 직접 만든 감각이 점점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인도네시아에서 바라본 ‘직접 만들기의 귀환’은 작품을 사지 않더라도 정신적 소유욕, 그리고 만지고 싶은 촉각적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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