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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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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문을 여는 ‘좋은’ 이야기를 만나는 기적 ‘타조소년들’

이분법으로 포착되지 않는 삶의 진실 이야기한 연극 <타조소년들> 보고 마음의 문을 연 학생… 환멸의 시대에도 세계를 향한 문은 다시 또 열릴 수 있다는 희망
등록 2023-08-18 13:10 수정 2023-08-22 04:54
연극 <타조소년들>의 한 장면. 청강문화산업대학 제공

연극 <타조소년들>의 한 장면. 청강문화산업대학 제공

‘좋은’ 이야기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한다.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자기 처지에 절망하면 사람은 자기만의 세계로 틀어박힌다. 더는 상처받지 않고 싶다. 다른 사람과의 소통은 무의미하다. 그렇기에 마음의 문이 닫힌 사람은 귀만 닫는 것이 아니라 입을 다문다. 감정이 북받치거나 살아 있음을 느껴야 할 때는 몸으로 소리만 낼 뿐 말하지 않는다. 말해서 의미를 전달한다는 것 자체가 세계가 다시 가능하다는 희망이 있을 때나 일어난다. 따라서 완전히 절망한 사람이 자신의 말문을 여는 좋은 이야기를 만나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이 기적으로 사람은 적어도 ‘당분간’은 살아갈 의지와 용기를 얻는다.

각자가 숨긴 어두운 진실을 마주하는 연극 <타조소년들>

연극 <타조소년들>의 공연을 보고 한 선생님이 감사의 인사를 보내왔다. 자기 학교에 자해와 자살 충동이 심한 학생이 있는데 그 학생이 연극을 보고 난 다음 말문을 열었다고 한다. 충동이 심하지 않을 때는 학교생활도 곧잘 하고 교사와 친구와도 잘 어울리는 학생이지만 기복이 심해 당사자와 가족, 교사와 학생들이 모두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 학생이 교사의 소개로 연극을 같이 보고 난 다음 교사와 소감을 나누며 자신과 자신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고 한다.

<타조소년들>은 청소년의 자살과 우정 문제를 다룬 영국의 청소년소설이 원작이다. 청소년 네 명이 절친한 동무인데 그중 ‘로즈’라는 친구가 죽는다. 나머지 세 명은 로즈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로즈의 마지막을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로즈의 유해를 빼돌려 로즈와 이름이 같은 도시 ‘로즈’로 데려간다. ‘로즈를 로즈에게’는 죽은 로즈가 입에 달고 있던 이야기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로즈로 가며 그들은 로즈가 사고를 당한 게 아니라 자살했음을 알게 된다. 이들이 친구 로즈와의 약속을 어떻게 어기거나 외면했는지 로즈가 자살한 그때 각자가 숨긴 어두운 진실을 마주 대하는 이야기다.

연극을 보고 이 학생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살을 다룬다고 해서 적당히 눈물을 빼게 하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아서 놀랐다. 우리 사회는 친구 간에도 믿을 수 없고, 그래서 언제나 불안에 떨어야 하는 사회다. 친구는 믿을 수 있는 존재여야 하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그가 말한 것처럼 이 연극은 “친구가 외면하고 심지어 적이 되기도 하는” 불안하고 불온한 기운을 다룬다. 이 학생은 연극을 보며 친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학생이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말하는 것, 그 자체가 희망이다. 다시 생각하게 됐다는 건 ‘이 견디기 힘든 것(현실)’에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거리를 둘 때야 비로소 관찰하고 관조하며 ‘견디기 힘든 것’ 이상을 보게 된다. 테리 이글턴의 <비극>에서 언어를 빌려와 말한다면 이야기는 독자에게 ‘견디기 힘든 것’을 제시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것을 “사유하고, 기리고, 기억하고, 조사하고, 애도하고, 일상생활로 흡수하고, 마주하고, 긍정의 순간을 발견하도록 권유”한다.

세계와의 적대로만 존재하는 ‘우리로서의 우리’

먼저 이 학생의 이야기를 듣고 놀란 것은 연극의 구조가 복잡해서 학생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중심 주제를 너무 명확하게 파악했다는 점이다. 소설과 달리 연극은 한 배우가 여러 역을 맡아 인물을 바꿔가며 진행되는데, 이 양식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 보면 이해되지 않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이 학생은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지만, 이야기를 파악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며 왜 제목이 <타조소년들>인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가 가해자일 수도, 피해자일 수도, 방관자일 수도 있다는, 자신의 진실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다룬 연극이라는 것이다. 연극 초반 주인공들이 말하는 것처럼 저들의 애도는 구역질 나는 거짓이고 우리만이 진실한 친구이기 때문에 애도할 수 있다고 믿는 그 단순한 이분법으로는 절대 포착되지 않는 각자의 진실 말이다.

이 진실은 어둡다. 누구보다 친한 친구라고 말하지만, 누구는 그 친구가 당하는 폭력의 순간을 외면하고, 누구는 절실한 도움의 신호를 감지하지 못하고 귀찮게 여기다 때를 놓치고, 누구는 배신한다. 가증스럽고 위선적인 저들과 진실한 우리라는 이분법은 이 각자의 진실을 외면하게 한다. 이런 이분법은 ‘우리’(We)를 절대적으로 부패한 ‘우리’(Cage)로 만들어 나 자신의 진실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킨다. 이거야말로 가장 환멸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될 때 세상에 대한 환멸은 자신에 대한 환멸로 나아간다.

세상에 대한 환멸에 머무르는 자와 그 환멸 속에 자신에 대한 환멸로 나아가는 자가 있다. 전자는 세계와 적대하며 손쉽게 자신과 화해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화해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자신과 적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세계와의 적대에 적극적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세계와 적대하기만 한다. 그 적대가 곧 자신의 존재 증명이라고 생각한다. 증명해야 할 자신이 무엇인지는 돌아보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렇기에 오로지 세계와의 적대로만 존재하는 자는 절대적으로 ‘우리’(Cage)로서의 ‘우리’(We)를 필요로 한다.

지금 세계에 이런 환멸이 넘쳐난다. 세계는 절대적으로 부패해 아무런 가망이 없다. 그렇기에 마치 이 세계에 어떤 가망이 있는 것처럼 낙관하거나 희망을 전파하는 것은 기만이다. 테리 이글턴이 <비극>에서 인용한 조지 스타이너의 말처럼 리어왕의 운명이 유료 노인 복지주택을 세우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적 희망’은 정말이지 무지하고 미숙한 것이다. 오히려 세상의 이 구제불능이라는 어두운 핵심을 본 사람들의 환멸이야말로 성숙한 것이다. 미성숙한 자들이 희망하며 성숙한 자들은 환멸을 가진다.

연극 <타조소년들>의 한 장면. 청강문화산업대학 제공

연극 <타조소년들>의 한 장면. 청강문화산업대학 제공

환멸을 느끼는 자신에 대한 환멸

이것이 현실에 환멸이 넘쳐나는 또 다른 이유다. 환멸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섣불리 희망을 이야기하고 거기에 넘어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어리석고 미숙하다. 환멸이야말로 성숙함의 징표이며 냉소는 계몽된 의식의 척도로 여겨진다. 세계에 대한 환멸에 머무르는 자는 이 부정한 세계를 불태우기 위해 ‘환멸 동맹’을 결성한다. ‘환멸 동맹’은 세계의 부정의에 환멸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자동으로 자신들만이 유일하게 자격을 갖춘 성숙한 존재라고 서로를 정당화한다.

이 ‘성숙한 환멸’의 건너편에 세계에 대한 적대와 환멸에서 자신에 대한 환멸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세계와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절한다. 세계도 가망이 없지만 동시에 세계가 가망 없다고 말하는 자신도 가망이 없는 존재다. 세계가 가망 없다고 환멸을 느끼는 가망 없는 존재로서의 자신에게 환멸을 느낀다. 이 환멸은 자신에 대해서도 구역질하는 구제불능의 완전히 무기력한 환멸이다.

이 환멸은 세계에 대한 적대와 냉소의 환멸보다 더 비관주의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다. 역설적으로 환멸감에 세상을 불태우겠다고 뛰어드는 자보다 세계와 단절하고 그 단절한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는 사람이 오히려 더 세계와 단절하지 못한/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무대 위에 올라 행동하지 않지만, 무대를 바라보며 고통스럽게 ‘관찰’하고 ‘관조’한다. 그들은 무대에 오르지 않았을 뿐 외면하지 않았다. 이 ‘관조’하는 사람에게서 새로운 ‘언어’가 탄생할 가능성이 나온다. 세계와 단절한 이 사람들이야말로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세계와 언어로 묶여 있다. <타조소년들>을 보고 어떤 관객보다 더 깊이 중심 주제를 읽어내고 말문을 연 저 학생처럼 말이다.

말문이 열린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말이 있다는 것은 세상에 고통 말고 다른 것도 있음을 증명한다. 만일 고통과 절망만이 있다면 ‘언어’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말 없는 울음’이라는 소리만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만이 가득한 세상에서는 이 세계에 대한 환멸감이 극에 이를 때 ‘말 없는 울음’만을 내거나 무대 위로 뛰어올라 닥치고 파괴적인 행동을 할 뿐이다. 나아가 ‘뿐’이라는 말로 그것을 정당화할 것이다. 그것이 정치적 행동이건, 무차별적 폭력이건 말이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절망이다. 진정한 절망은 ‘성숙한 환멸’의 미성숙한 산물이다.

물론 말할 수 있는 한 죽지 않는다고 하지만 말문을 연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희망을 바로 주는 것도 아니다. 말은 여전히 무력하며 말로 파악하고 전해지는 가치는 바람 한 번에 훅 꺼질 만큼 연약하고 쉽게 휘둘린다. 말할 수 있음에 기대를 걸었다가 그 무력함에 절망하고 말 자체에 환멸을 느낄 가능성이 더 크다. 무엇보다 말하게 됐다고 해서 과거의 상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고통이 무효가 되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도 과거는 바꿀 수 없다. 하느님도 괴로움 속에 죽은 사람들이 사실은 기쁨 속에 이승을 떠난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말에 그것을 기대하는 거야말로 또 다른 어리석음일 것이다.

상처를 직시하게 하는 이야기의 힘

이야기의 힘은 현재의 환멸을 부정하고 극복해 희망으로 바꾸는 것에 있지 않다. 이야기는 다만 환멸이 남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직시하게 한다. 그것이 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것, 아니 반복되리라는 것도 직시하게 한다. 다만 이야기는 그것 때문에 절망해 영영 세계와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대면과 만남에 대한 용기를 ‘한 번은’ 내게 한다는 것이다. 한번 용기를 내면 다음까지는 살아갈 수 있다. 이번에 말문을 연 그 학생은 아마 알 것이다. (어른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이 한 번으로 자신과 세계에 대한 환멸이 끝나지 않으며 자신과 완전히 화해하고 세계로 나가는 그런 것은 없음을 말이다.

다만 ‘좋은’ 이야기와의 만남은 세계를 향한 자신의 문이 완전히 닫힌 게 아님을 발견해, 비록 또 닫힌다고 하더라도 다시 만난다면 이 환멸의 시대에 그 문은 다시 또 열릴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그러면 적어도 다음까지는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갈 용기를 내게 한다. 독자와 관객이 이런 만남을 한다면 이야기를 만든 사람도 역시 다음에 또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기운을 내게 된다. 이번 <타조소년들> 공연처럼 말이다. 이것이 무대에서, 종이에 인쇄돼, 스크린에 뿌려지며, 이야기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몫이라면 이야기를 만나고, 이야기를 통해 만나는 공간인 극장과 도서관이 마을마다 있어야 하는 이유다. 거기가 삶이 살아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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