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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권리 공백, 누락일까 배제일까

근대 정치이론에서 장애인의 시민 위치 살펴본 <장애의 정치학을 위하여>
등록 2023-06-02 18:12 수정 2023-06-08 10:41
2023년 3월23일 서울 지하철 시청역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관계자들이 서울 420 장애인차별철폐연대 투쟁 선포 결의대회를 연 가운데 한 참석자가 '전장연은 서울시 적군이 아니다' 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신소영 한겨레 기자

2023년 3월23일 서울 지하철 시청역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관계자들이 서울 420 장애인차별철폐연대 투쟁 선포 결의대회를 연 가운데 한 참석자가 '전장연은 서울시 적군이 아니다' 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신소영 한겨레 기자

“나는 소년 로비가 얼마나 고립되어 있는지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로비는 아이들이 집에 놀러 오지 않으면 친구들과 놀 수 없었다. 나와 내 친구들이 어느 대학에 가고 무엇을 하며 살지 고민하는 동안, 로비는 미래의 삶에 대한 두려움, 즉 자신의 부모가 더는 그를 돌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시설로 보내질 것이라는 끊임없는 두려움 속에 살았다.”

영미권 정치학자들이 정치이론에서 장애인이 어떻게 배제됐는지를 검토한 책 <장애의 정치학을 위하여>(후마니타스 펴냄)는 미국 정치학자 데버라 스톤이 어린 시절 경험을 담아 쓴 서문으로 시작한다. 데버라 주변엔 뇌성마비를 지닌 중증장애인 소년 ‘로비’가 있었는데, 그를 받아주는 학교가 없어 로비의 어머니가 그를 돌보고 가르치는 데 모든 시간을 바쳐야 했다. 로비에겐 시민의 권리가 당연하지 않았다.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 가까운 학교에 다닐 권리,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권리. 데버라는 “우리가 그들이 배제되도록 방치하고 있음을 알았다”면서도 “그 당시 내게 장애는 정치적 문제가 아니었고, 그들(로비와 그 가족)이 짊어져야 할 짐”으로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데버라 혹은 우리가 경험한 사회에서처럼 근대 정치이론에서도 장애는 무시돼왔다. 이 책을 엮은 바버라 아네일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정치학 교수는 존 로크, 데이비드 흄, 이마누엘 칸트, 존 롤스 등의 사상을 검토하면서 ‘장애에 대한 비하적 정의’와 ‘시민권에서의 장애인 배제’ 사이 연관성을 보여준다. 가령 로크는 정신적 장애나 질환을 지닌 사람은 ‘결코 자유인이 될 수 없다’고 했고, 흄은 정신적·신체적 장애인을 저항할 수 없기 때문에 평등하지 않은 존재로 바라봤다. 칸트는 ‘이성적 자율성’에 인간 존엄성의 토대라는 절대적 위상을 부여했는데, 그렇다면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없는 이들은 그 바깥에 존재하게 된다. 롤스는 ‘공정한 협력 시스템으로서의 사회’를 이야기하면서 절차상 이유로 ‘정상적이고 충분히 협력적인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영구적인 신체적·정신적 장애를 지닌 이들은 제쳐둔다’고 했다.

이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저명한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 미국 시카고대학 교수의 의견을 비판한 루커스 G. 핀헤이로의 주장도 흥미롭다. 누스바움은 근대 초기 유럽에서 장애인이 비가시화된 결과, 고전적 계약이론가들이 협상자의 위치에서 장애인을 ‘누락’했다고 봤다. 이에 대해 저자는 ‘절차상 누락’이 아니라 ‘배제’였다며, ‘누락’을 강조하는 것은 ‘사회계약론의 배제 전략 내에 존재하는 차별적 의도를 가리게 한다’고 반박했다.

정치철학을 다룬 책이지만 골방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어린 시절 데버라처럼 오늘날 한국의 대다수 시민 역시 일상에 치여 장애인의 권리를 고민할 기회를 갖기 어렵다. 장애인은 국회와 시청 앞에서 확성기를 켜고 외쳤지만 뉴스가 되지 못했다. 지하철로 나아가 ‘불편’을 야기하자 비로소 사람들이 돌아봤다. 단, 부정적으로 돌아봤고 이때 일부 정치인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출근길 시위가 정당하냐’며 혐오에 편승했다. 많은 장애인과 그 가족이 목숨을 끊어도 관심 있게 보지 않았던 이 정치인들은, 장애가 소수의 경험인 동시에 언젠간 누구나 겪어야 할 인간 보편의 경험임을 잊은 듯, ‘다수’와 ‘소수’의 유권자로 이들을 구분 지었다. 후대는 지금 한국 사회를 장애인 시민권 ‘누락’의 역사로 평가할까, ‘배제’의 역사로 평가할까. 책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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