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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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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문 닫을거라던 독립서점이 영국서 늘었다고?

1877년 빈민가 재개발 뒤 생겨난, 런던 서점의 출발점 채링크로스
책을 매개로 나눈 친절과 우정을 보여준 <채링크로스 84번지>
등록 2023-04-07 13:48 수정 2023-05-17 01:50
영국 런던 채링크로스의 대표적 서점이었던 마크스 서점. 궁리출판사 제공

영국 런던 채링크로스의 대표적 서점이었던 마크스 서점. 궁리출판사 제공

넬슨 제독 기념비가 서 있는 트라팔가 광장을 지나 코번트 가든 쪽으로 간다. 헬렌 한프가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써서 유명해진 영국 런던의 중고서점 거리 채링크로스로 가기 위해서다. 레스터 스퀘어 역을 지나면 서점이 하나둘 보인다. 에니 어마운트 오브 북스, 헨리 포더스 북스 그리고 포일스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관광객이 채링크로스에서 찾고 싶은 건 마크스 서점(Marks & Co)이다. 하지만 채링크로스 84번지에 있던 서점은 오래전 문을 닫았고 지금은 맥도날드가 있다. 다만 옛 건물은 그대로 남아 있어 왼쪽 기둥에 마크스 서점이 있던 자리임을 알리는 동판만을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유명한 마크스 서점은 사라졌지만

<채링크로스 84번지>는 책과 서점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에게 <서재 결혼 시키기>와 더불어 바이블 같은 존재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뉴욕에 사는 작가 헬렌 한프는 런던 채링크로스에 있던 마크스 서점에 책을 사기 위해 편지를 쓴다. 헬렌이 찾는 고전은 미국 서점에서 구할 길이 없었다. <토요문학평론지>에 실린 마크스 서점의 광고를 보고 첫 주문을 한 이후 무려 20여 년 동안 헬렌과 마크스 서점의 프랭크 도일은 편지를 이어간다. 서점에서 일하는 사람과 독자 사이에 맺어진 진실한 우정을 이토록 잘 보여주는 책은 없다.

채링크로스가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 거리는 아니다. 런던은 몇 구역으로 나뉜다. 로마인이 쌓은 성벽의 안쪽을 `시티 오브 런던’이라고 한다. 서울의 사대문 안에 해당하겠다. 어디나 성밖에는 가난한 사람이 모여 성안에 기대어 살기 마련이다. 시티 오브 런던의 서쪽인 채링크로스는 런던의 대표적인 빈민가였다. 1877년 재개발이 이뤄지고 나서 전문서점과 중고서점이 거리에 생겨났다. 물론 지금이야 채링크로스는 런던의 최고 중심지다.

마크스 서점은 채링크로스 거리에 1920년 문을 열었다. 서점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유대인 벤저민 마크스와 마크 코헨이 동업했다. 세계대전 전후로 유럽의 유대인이 영국으로 이주해 서점과 출판업에 종사하던 때다. 헬렌과 편지를 주고받은 프랭크 도일은 마크스 서점에서 고서를 구매하고 판매하는 일을 맡았다. 서점 직원은 6명이었고 찰리 채플린, 조지 버나드 쇼 같은 저명인사가 단골로 드나들었다. 프랭크 도일은 서점에서 40년을 근무하다 1968년 세상을 떠났고 마크스 서점도 1970년 문을 닫는다.

마크스 서점은 이때부터 유명해진다. 1970년 헬렌 한프가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출간해 성공을 거두자 드라마와 연극으로도 만들어졌다. 이어 1987년에는 앤 밴크로프트와 앤서니 홉킨스가 주연을 맡은 영화로 제작됐다. 덕분에 채링크로스는 세계인에게 런던을 대표하는 서점 거리로 각인됐다. 채링크로스 거리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서점 중 하나인 에니 어마운트 오브 북스의 질리언 맥멀런은 여전히 “마크스 서점이 어디 있나요?” 하고 묻는 관광객이 있다며 웃었다. 나 역시 런던의 서점을 찾는 출발점으로 채링크로스를 택하지 않았나.

영국 런던의 채링크로스를 여전히 지키고 있는 서점인 에니 어마운트 오브 북스 서점. 셔터스톡

영국 런던의 채링크로스를 여전히 지키고 있는 서점인 에니 어마운트 오브 북스 서점. 셔터스톡

달걀·고기 답례품으로 가죽장정 시집을

어찌 보면 별다른 드라마도 없는 이 책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유대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얼굴 한번 본 적 없어도 책을 매개로 친절과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지만 전후 영국의 경제 사정은 무척 어려웠다. 마크스 서점의 직원들도 배급받았다. 이를 알게 된 헬렌은 크리스마스, 사순절, 부활절마다 서점 직원들에게 통조림, 달걀 한 상자, 고기, 나일론 양말 같은 선물을 보낸다. 서점 사람들이 답례로 가죽 장정에 금테가 둘린 시집을 보내자 헬렌은 기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제가 보낸 것은 일주일이면 싹 먹어치우고 설날이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을 텐데, 제가 받은 것은 죽는 날까지 간직했다가 누군가 그것을 아껴줄 이에게 남길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는, 그런 선물이잖아요.” 한 권의 책으로 허기를 달래지는 못하겠지만 영원한 충만감을 약속한다.

채링크로스에는 이름난 서점이 여럿 있었다. 1923년 안톤 즈워머가 시작한 즈워머 서점(Zwemmer's Bookshop)은 피카소, 헨리 무어, 윈덤 루이스 등 예술가들의 친구이자 후원자 역할을 한 서점 이상의 서점이었다. 여기서 일했던 클레어 드 루앙은 2005년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서점을 열었다. 패션, 미술, 사진 서적을 판매했지만 임대료가 상승하자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서점을 살리자는 운동이 벌어졌지만 역부족이었다. 클레어 드 루앙 서점은 베스널그린으로 자리를 옮겨 루시 무어가 운영한다. 범죄와 미스터리 전문인 머더원(Murder One)이나 앤티크 서점을 겸한 퀸토 북스(Quinto Books) 등도 모두 문을 닫았다.

지금 채링크로스에는 두 곳의 중고서점이 있다. 1983년 시작한 헨리 포더스 북스는 창업자 포더가 세상을 떠난 뒤 딸과 사위가 운영하는 가족 서점이다. 이름에서 짐작하듯 엄청난 책더미를 자랑하는 에니 어마운트 오브 북스는(Any Amount of Books)는 1920년대 시작했다. 지금은 서점에서 일했던 질리언 맥멀런이 운영한다.

독립서점 2016년 867개, 2022년 1072개

그 많던 채링크로스의 서점만 문을 닫은 게 아니다. 영국의 독립서점은 1996년부터 2016년 사이 지속적으로 감소해 2016년 867개로 최저치를 기록했다. 독립서점이 모두 문을 닫을 거라는 비관론이 이어졌다. 놀랍게도 영국서점협회BA에 따르면 6년 연속 독립서점이 증가했고 2022년 말 1072개를 기록했다. 대체 영국의 독립서점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한미화 <동네책방 생존탐구> 저자

*유럽의 서점을 돌아보며 우리 서점의 내일을 생각해본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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