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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보다 책을 잘 파는 서점 진열의 비밀

명품가방 대신 드는 영국 런던 돈트북스의 캔버스백…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학과 여행서 전문 독립서점
등록 2023-11-17 22:23 수정 2023-11-22 10:41
돈트북스를 상징하는 2층 발코니에서 본 서점 풍경.

돈트북스를 상징하는 2층 발코니에서 본 서점 풍경.

대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책 없이 빠져드는 공통 품목이 있다. 연필이나 펜 같은 필기구 그리고 다이어리 등 노트, 여기에 하나를 더 꼽으라면 에코백이 아닐까. 책과 관련한 굿즈로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품목이다. 캔버스백으로 유명한 서점이라면, 미국 뉴욕 스트랜드와 영국 런던 돈트북스(Daunt Books)를 꼽을 수 있다. 스트랜드는 2022년 이탈리아의 명품가방 브랜드 보테가 베네타가 협업 요청을 할 만큼 타원형 로고가 새겨진 캔버스백이 심벌(상징)이다. 돈트북스도 이에 못지않다. 2008년 벨기에의 스타 모델 아누크 르페르가 명품가방 대신 돈트북스의 캔버스백을 든 사진이 화제가 됐다. 이후 헬레나 보넘 카터, 키라 나이틀리, 베네딕트 컴버배치 등 영화배우들이 돈트북스의 백을 든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지성을 뽐내고 싶다면 돈트북스의 가방은 필수라고나 할까.

JP모건 은행원이 여자친구 말을 듣고

캔버스백이 아니라도 돈트북스는 오늘날 세계에서 유명한 독립서점 중 하나로 손꼽힌다. 서점 자체의 아름다움은 물론이고 창업자 제임스 돈트의 명성도 한몫한다. 원래 그의 직업은 은행원. 1985년에서 1988년까지 미국 제이피(JP)모건에서 근무했다. 평범한 직장인이던 돈트가 서점인이 된 계기는 로맨틱하다. 지금은 아내가 된 여자친구가 돈트에게 개인 시간도 없이 회사일에 매달려 살지 말라고 권유한 것. 결국 돈트는 직장을 그만두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고민한다. 결론은 독서와 여행. 1990년 그는 런던 말리번 거리에서 문학과 여행서를 전문으로 하는 돈트북스를 시작했다.

말리번 하이 스트리트에 있는 돈트북스 건물은 에드워드 7세(1841~1910) 시절에 지어진 고풍스러운 건물이다. 돈트가 1990년 이 건물에 서점을 열자마자 영국 경제의 거품은 꺼지고 높은 임대료가 부담스러운 불경기가 시작됐다.

말리번은 세련된 가게, 카페, 펍, 레스토랑, 호텔이 많은 노른자 상권지대다. 소설 속에서 셜록 홈스의 집으로 등장한 베이커 스트리트 221B의 셜록 홈스 박물관과 리젠트파크가 가까워 관광객도 많다. 나 역시 이 지역을 방문하고 나서야 말리번이 얼마나 세련된 주거지인지를 알았다. 저가 상품을 내세운 체인숍 대신 개성 있는 작은 가게와 럭셔리숍이 들어온 고급 주택지였다. 지갑이 두툼한 가족 단위의 고객이 방문할 수 있는 지역임은 분명하지만, 고객이 서점에서 지갑을 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창업 초기 돈트는 책을 팔아 돈을 버는 방안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한 권의 책을 쇼윈도에 집중 진열하는 돈트북스.

한 권의 책을 쇼윈도에 집중 진열하는 돈트북스.

직원 안목, 단골 고객의 리뷰가 진열되다

출입구와 이어진 돈트북스 1층 전면부에는 신간과 어린이서적이 진열됐다. 조금 더 서점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오르면 오크로 만든 2층 발코니 서가에 갈 수 있다. 발코니에 서면 유리 천장을 뚫고 햇살이 비추는 탁 트인 서점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돈트북스 하면 떠오르는 상징적인 서점 풍경이다.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가디언>이 ‘세계 10대 서점’으로 선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1층 로비에 새겨진 ‘Through to Books Arranged by Country’’라는 문구를 기점으로 서점 후면부는 책을 장르가 아닌 대륙별, 국가별로 진열한 공간이다. 돈트북스의 특징적인 큐레이션이다. 예컨대 크로아티아, 그리스, 네덜란드, 일본 등의 서가에서 독자는 그 나라를 가장 잘 보여주는 소설, 에세이, 여행안내서를 만날 수 있다. 국가별 큐레이션이 뭐 그리 대단할까 싶지만, 한 나라에 관한 책 중 핵심 도서를 골라야 한다는 점에서 서점인의 내공이 필요한 진열이다.

돈트북스의 매력적인 공간 구성과 큐레이션 말고 더 놀라운 게 있다. 서점인에게 가장 중요한 일, 서점의 영속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은 도서 판매다. 돈트북스는 책을 잘 파는 서점이다. 제임스 돈트의 친구이자 전직 변호사이며 총괄매니저인 브렛 울스턴크로프트는 돈트북스의 쇼윈도 진열을 통한 판매를 예로 들었다. 돈트북스는 윌리엄 모리스의 패턴이 인쇄된 천을 깔아놓은 서점 쇼윈도마다 한 권의 책을 집중해서 진열하고 판매한다. 내가 방문한 날에는 루이즈 케네디의 소설 <무단침입사건>(Trespasses)과 이탈리아의 여성작가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작품들을 리뷰와 함께 왼쪽과 오른쪽 쇼윈도에 각각 단독 진열해 조명하고 있었다. 울스턴크로프트는 “대형 체인서점의 매대가 출판사의 입김으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돈트북스는 직원들의 안목과 단골 고객의 리뷰로 꾸며진다”며 자부심을 내보였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불리는 영국 런던 돈트북스 전경. 위키미디어 코먼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불리는 영국 런던 돈트북스 전경. 위키미디어 코먼스

절판된 책과 신간 문학서 펴내는 출판사도 시작

돈트북스는 개점 5년 만에 매출 14억원을, 2010년에는 98억원을 기록했다. 처음에 5명 안팎이던 직원은 40명으로 늘었다. 2010년에는 절판된 책과 신간 문학서를 펴내는 동명의 출판사도 시작했다. 돈트북스는 꾸준히 성장해 2022년 130억원 규모의 매출과 60명 넘는 직원이 일하는 독립서점이 됐다. 말리번에서 시작했으나 이제는 런던과 인근 지역으로 확장해 총 8개 지점이 생겼다. 런던의 홀랜드파크, 칩사이드, 햄프스테드, 벨사이즈파크와 옥스퍼드의 서머타운에 돈트북스 지점이 있다. 또 기존 서점을 인수했으나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하츠북스, 아울북숍, 말로북숍이 있다.

돈트북스는 성공한 서점이다. 하지만 제임스 돈트의 행보가 여기서 그쳤다면 뉴욕의 스트랜드 서점과 그리 다를 건 없다. 20세기 영국 서점의 여왕인 크리스티나 포일에 이어 제임스 돈트가 21세기 독립서점의 영웅이 된 이유는 따로 있다. (다음 편에 계속)

런던(영국)=글·사진 한미화 <동네책방 생존탐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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