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200년 지나도 설레…‘오만과 편견’ 작가는 그 서점에 갔을까

작가와 인연으로 이야기와 역사를 얻는 서점… P&G 웰스와 제인 오스틴, 200년 뒤의 독자도 설레게 하네
등록 2023-12-29 19:36 수정 2024-01-02 23:22
영국에서 현존하는 서점 가운데 가장 오래된 P&G 웰스. 빅토리아 시대의 나무 입면을 갖고 있다. 스티븐 프로스트

영국에서 현존하는 서점 가운데 가장 오래된 P&G 웰스. 빅토리아 시대의 나무 입면을 갖고 있다. 스티븐 프로스트


서점이 영원함을 얻는 길이 있다면 친구들 때문이다. 서점의 친구 중 하나인 작가와 맺은 인연으로 많은 서점이 역사에 남았다. 프랑스 파리의 셰익스피어앤컴퍼니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제임스 조이스가 이 서점의 단골이었고 결정적으로 <율리시스>가 이곳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시티라이츠도 비슷하다. 서점을 운영한 로런스 펄링게티가 앨런 긴즈버그의 <울부짖음>을 출간한 이유로 명성을 얻었다. 영국의 왕실 인증 서점으로 유명한 런던의 해처즈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단골이었다. 또 낭만파 시인 조지 바이런과 빅토리아시대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해처즈를 좋아했다.

우리 역시 작가와 서점이 만난 인연이 없을 리 없다. 시인 김용택이 일요일마다 전북 전주에 가서 온종일 책을 읽었더니 직원이 아예 의자를 내주었다는 서점, 소설가 박경리가 인천 배다리에서 열었던 서점 등이 기록 속에서 존재한다. 하지만 이야기를 품은 채 여전히 살아남아 독자를 만나는 서점은 거의 없다. 아쉬운 일이다.

 

잉글랜드의 가장 오래된 서점 P&G 웰스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은 해처즈다. 1797년 존 해처드가 설립했다. 하지만 영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점은 아니다. 윈체스터의 피앤지 웰스(P&G Wells)가 이보다 앞서 1729년 시작했다. 하지만 P&G 웰스에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긴 역사 때문이 아니었다.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을 쓴 제인 오스틴이 이 서점을 다녀갔을 확률이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제인 오스틴은 여러 도시에서 살았는데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이 P&G 웰스와 지척이다. 어릴 때부터 읽고 쓰기를 즐겼던 제인 오스틴이 바로 옆에 서점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가보지 않았을까.

윈체스터의 P&G 웰스가 언제 시작됐는지 알려주는 흔적이 남아 있다. 기록의 나라 영국다운 일이다. 1729년 이 서점이 지역 대학과 거래한 영수증이 남아 있다. 이 자료로 1729년에 이미 서점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750년대에 지금 서점이 있는 칼리지 스트리트로 이전했다. 최초의 주인은 앰브로스 홀러웨이였지만 1750년대 버든 부부가 서점을 인수했다. 버든 부부는 교재 출판을 겸하며 사업을 확장했다. 1866년에는 조지프 웰스가 서점을 인수했다. 오래된 영국 서점은 이런 식으로 이어져 현재에 이른다.

1700년대 초반부터 서점이 있었다는 건 윈체스터가 그만큼 중요한 도시였다는 뜻이다. 윈체스터는 지금은 관광안내 책자에 소개되지 않을 만큼 조용한 소도시다. 하지만 앵글로색슨 시대 잉글랜드의 수도였다. 이 때문에 유럽에서 가장 큰 고딕 성당인 윈체스터대성당과 윈체스터대학이 존재한다. 이런 조건을 갖춘 지역에는 일찍부터 서점이 자리잡았다. 1700년 이전에도 서점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알 수는 없고 P&G 웰스가 남아 그 역사를 증명한다. 서점에 있는 마호가니로 만든 카운터, 책상과 책장 등은 1889년부터 내려오고, 진열창(쇼윈도)이 있는 서점 전면도 1891년 만들어져 오늘에 이른다.

1810년 언니 커샌드라가 그린 제인 오스틴의 초상. 영국 런던 국립초상화미술관 소장

1810년 언니 커샌드라가 그린 제인 오스틴의 초상. 영국 런던 국립초상화미술관 소장


 

마지막 머문 집이 P&G 웰스와 한 집 건너

 

제인 오스틴은 잉글랜드 남부 전원 지대 햄프셔주 스티븐턴에서 태어났다. 열다섯 살에 목사인 아버지가 은퇴하며 사교의 중심지인 바스로 이사해 살았다. 그의 작품 속에 바스가 종종 등장하는 이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여기저기 떠돌다 1809년에 제인은 부잣집에 양자로 간 셋째 오빠 에드워드의 도움으로 초턴의 코티지에 머문다. 이곳에서 <이성과 감성>(1811), <오만과 편견>(1813), <맨스필드 파크>(1814), <에마>(1815), <설득>(1817)이 탄생한다.

그러나 작가로서 인정받자마자 마흔 살 무렵 제인의 건강이 악화한다. 침대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자 언니인 커샌드라는 제인을 윈체스터로 데려간다. 유명한 의사에게 동생을 보이고 치료받기 위해서였다. 이런 이유로 제인 오스틴이 마지막으로 머물게 된 칼리지스트리트의 집이 공교롭게도 P&G 웰스와 한 집 건너에 있다.

제인은 아버지가 소유한 500여 권의 장서를 읽으며 자랐다. 어릴 때부터 글을 써 가족 앞에서 낭독했고 16살에는 제인이 글을 쓰고 커샌드라가 그림을 그린 <영국사>를 지었다. 딸의 재능을 지지했던 아버지는 제인이 19살 때 글쓰기 책상을 선물했다. 이런 제인이라면 자기가 머무는 곳 바로 옆에 서점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가지 않을 리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편지와 기록을 통해 제인 오스틴을 입체적으로 복원한 존 스펜서의 책을 읽고 난 뒤 생각이 달라졌다. 그가 쓴 <제인 오스틴>에 의하면 제인이 윈체스터에 온 날짜는 1817년 5월24일이다. 의사인 라이퍼드가 진찰했지만 절망적이었다. 결국 제인은 7월18일 통증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너무 위중한 상태로 윈체스터에 온 것이다. 제인 오스틴의 단골 서점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고 상상했지만, P&G 웰스에 가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서점이 영원함을 얻는 길

 

제인 오스틴은 작가라는 자의식을 지니고 글을 써서 돈을 벌고자 했던 최초의 여성 작가 중 한 명이다. 여성을 ‘가정의 꽃’ 정도로 여겼던 빅토리아 시대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앞선 사고를 지닌 작가였다. 이런 제인 오스틴과 관련이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P&G 웰스는 서점 이상이 된다. 물론 P&G 웰스도 제인 오스틴의 책을 별도로 진열하고 학회와 관계를 맺으며 각별한 관심을 쏟고 있다.

책과 서점이 존재하는 날까지 작가와 책방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무릇 작가라면 사랑하는 서점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작가와 서점이 서로에게 빛이 돼주는 길이고 200여 년 뒤의 독자를 설레게 하는 일이다.

한미화 <동네책방 생존탐구> 저자

유럽 책방: 유럽의 서점을 돌아보며 우리 서점의 내일을 생각해 봅니다. 3주마다 연재.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