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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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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낮에 낫을 든 여자

웃자란 풀, 낫으로 베어보고 얻은 것들
등록 2022-11-29 10:10 수정 2022-12-09 05:38
이장님께 배운 낫질대로 남편이 풀을 베고 있다.

이장님께 배운 낫질대로 남편이 풀을 베고 있다.

나무를 심은 이듬해 6월, 이장님이 호출한 용건은 풀이 너무 웃자라 민원이 쇄도하니 와서 어떻게든 하라는 거였다. 이대로 방치하면 미경작으로 벌금을 물게 된다고 했다. “주민이(―) 신고를 안(↘) 해도(↗) 항공사진을 찍어서(↘) 풀밭으로(↗) 나오면 면에서(↘) 처분 들어간다고요.(↘)” 맥없는 강원도 사투린데 내용은 무서웠다. 낫 두 자루와 햇빛 차단용 검정 부직포 몇 롤을 인터넷으로 샀다. 낫으로 베고 부직포를 덮어 풀이 자라는 걸 막겠다는 계산이었다. 토요일에 K언니와 함께 마티즈에 장비를 싣고 진부로 내려갔다.

밭에서 이장님을 만났다. 풍채 좋은 40대 아저씨였다. 무릎까지 자란 풀이 1200평을 덮고 있었다. 기본적인 호구조사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낫 두 자루를 꺼내자 이장님이 헛웃음을 치고는 풀을 처리하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하나는 트랙터로 갈아엎어 풀뿌리부터 싹 정리하는 근원적인 해결책. 그런데 우리 밭은 맹지(도로로 맞닿은 부분이 전혀 없는 토지)라 옆 밭을 밟고 기계가 들어와야 하는데, 이미 옆 밭은 작물을 심어 기르는 중이다. 실현 가능한 다른 방법은 예초기로 풀을 깎는 것. 그런데 우리에겐 예초기가 없고 사용해본 적도 없어 시도가 어렵다.

“이거로 하는 데까지 해보려고요.” 내가 해맑게 대답하자 이장님은 낫질은 할 줄 아냐며 (한숨) “자, 이렇게 한 손으로 풀을 한 줌씩 휘어잡고 아래쪽으로 낫을 넣어 당기면 돼요. 잘못하면 발목을 찍을 수 있으니까 절대 내 쪽으로 당기면 안 되고, 옆으로 당겨야 해요.” 이장님은 시범을 보여준 뒤 잘해보라며 돌아갔다.

와이 낫? 처음엔 할 만했다. 휘어잡고 슥 당기고. 30분 하고 맥주 한 캔 마시며 보니 꽤 많이 벤 것 같았다. 풀을 벤 곳을 부직포로 덮었다. 폭 2m짜리를 5m 정도 길이로 잘라 덮고 철사 핀을 돌로 박아 고정했다. 10㎡면 몇 평이야. 이른 오후에 시작해 해가 산으로 넘어가 서늘해질 때까지 작업한 양이 보폭으로 재보니 100평 좀 못 되는 것 같았다. 와~ 열흘만 하면 다 베겠네.

아이 캔 낫. 낫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이걸 해보고야 알다니. 덩달아 고생한 K언니에게 미안했다. 일요일 하루 더 작업할 계획이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그럴 몸 상태가 아니었다. 하루 더 하나 덜 하나 티도 안 나고. 일찍 낫을 챙겨 차 밀리기 전에 돌아왔다.

그렇게 풀 베러 가서 건진 건 ‘낫띵’이었을까? 그렇진 않은 것 같다. 첫째, 이장님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훗날 이장님과 좀 친해지고 나서 처음에 낫 들고 풀 벤다고 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물어보니 “아, 참 훌륭하신 분들이구나~” 싶었다고 했다. 둘째, 농사가 의외로 적성에 맞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단순 반복 작업을 하니 마음이 평화롭고 땀나게 일하고 성과가 눈에 바로 보이니 진짜 일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가을에 이장님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이제 풀씨가 여물어 날리기 시작하니 정말 풀을 베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장님 소개로 사람을 구해 일당 26만원을 들여 예초기로 풀을 베었다. 겨울에 이장님이 또 연락해왔다. 출판사에 다닌다고 들었는데 혹시 건배사책이 있으면 구해달라 하셨다. ‘구구팔팔~ 99살까지 88하게~’ 이런 유의 언어유희와 덕담이 가득한 책을 찾아 보내드렸다. 그땐 몰랐다. 작은 도움과 호의가 풀씨처럼 밭에 떨어져 나도 모르게 뿌리를 내릴 줄은.

글·사진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박기완 토종씨드림 활동가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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