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벨 훅스는 ‘사랑에 빠진다’는 말을 싫어한다. 사랑이 불가사의한 힘에 사로잡힌 결과물이면 자기 행동에 책임질 필요가 없어진다. 그는 제대로 사랑하려면 그 정의부터 바로 해야 한다고 책 <올 어바웃 러브>에 썼다. 그가 내린 사랑의 정의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자아를 확장하고자 하는 의지이자 실천”이다. 매 순간 결심하고 노력해야 할 수 있다. 존중과 배려, 돌봄을 단련해 자신과 타인을 도구가 아니라 목적으로 삼으려는 노력이다. 이 글에선 이런 사랑만 사랑이라고 하자.
한국 사회가 슬픈 가장 큰 이유는 사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벨 훅스의 정의에 맞는 사랑을 하려면 먼저 인간 대 인간으로 서야 하는데, 이곳에선 사람에게 가격표가 붙는다. 값을 결정하는 카테고리는 점점 촘촘해진다. 거주지, 출신학교, 직장, 외모…. 값은 원래 상품에만 붙으니, 아무리 비싼 값이 붙더라도 인간에겐 모멸이다. 한번 붙은 가격표를 바꾸기도 어렵다. 값이 떨어지면 자존도 떨어지는 곳에선 모두가 두렵다. 값 떨어질까 벌벌 떨다보면 사람보다 가격표를 보게 된다. 이곳에서 사랑은 가능한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는 살아 있는 걸까?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연출 김석윤, 극본 박해영)는 이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며, 상품이 아니라 사람으로 살라고 부추긴다. 그 방법은 이렇다. “추앙하라.”
첫 회를 볼 때만 해도 고구마 백 개를 삼킨 것 같았다. 서울에 진입하려면 1시간30분은 걸리는 산포시에 염기정(이엘), 창희(이민기), 미정(김지원) 삼 남매가 산다. 부모님은 싱크대 공장을 하며 농사를 병행한다. 삼 남매는 서울로 출퇴근하는데 그 과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모든 게 “계란 노른자” 같은 서울에 몰려 있는 이 나라에서 “흰자” 부근에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매일 경험하는 고문이다. 이런 깨알 같은 일상의 ‘고문’은 계급을 환기한다.
‘네 값은 이거야.’ 여론조사기관에 다니는 기정은 아이가 있는 이혼남을 소개받았다며 길길이 뛰고, 편의점 관리를 하는 창희는 여자친구에게 “견딜 수 없이 촌스럽다”는 말을 듣고 이별한다. 카드 회사에 다니는 미정은 도통 표정이 없다. 존재감이 흐릿하다. 상사는 미정이 낸 시안에 빨간펜을 죽죽 그으며 한숨을 쉬어댄다. 전 남자친구는 미정이 대출까지 받아 빌려준 돈을 갚지 않고 도망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고, 긴긴 시간 이렇게 보내다가 말라 죽을 거 같아요.”(미정의 독백) 이곳에선 “모든 관계가 노동”이다. 사람들은 침묵이 오면 존재가 사라질 것처럼 의미 없는 말을 쏟아낸다. 미정은 말이 없다. 그가 선택한 소극적 저항인지도 모른다.
자기 가격표가 빤하니 사랑 앞에서 자꾸 ‘쫄보’가 된다. 창희는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자에게 답하지 않는데 그 여자가 싫어서가 아니다. “그 애 욕심 빤하고, 내 주제 빤하기” 때문이다. 상처받지 않으려면 수능 점수 맞춰 대학 가듯, 자기 가격표에 따라 ‘사랑’을 거래해야 한다. “뉴욕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서울에서 태어났으면”이라는 오빠 창희에게 미정은 말한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면 우리는 달랐어?” 창희의 답은 ‘그렇다’이지만 미정은 동의하지 않는다. 이 “갇혀 있는 느낌”은 자신의 몸값을 높인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정은 “뚫고 나가기”로 결정한다. 가장 존재감 없어 보이던 그가 결정하는 자,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다. 그는 사랑을 선택한다. 살기로 결심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인간 대 인간으로.
구씨(손석구)는 삼 남매 아버지 일을 돕는 일꾼이다. 수상한 이방인이다. “(역에서) 잘못 내리는 바람”에 이곳에 왔다고 한다. 아무도 이름을 모른다. 매일 소주를 마신다. 멍하게 앉아 술 마시는 구씨에게 미정은 말한다. “할 일 줘요? 나를 추앙해요. 사랑으로는 안 돼. 추앙해요. 나는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왜 추앙일까? 미정의 말에 따르면 추앙은 “인간 대 인간으로 전적으로 하는 응원”이다. “전적으로 준 적도 없고, 전적으로 받은 적도 없어. 부모한테도 그런 응원 못 받고 컸어.” 미정이 살았지만 죽어 있다고 느끼는 까닭이다. 상대의 존재 자체를 찬양하는 추앙은 애초에 준 만큼 되돌려받기를 바라지 않는 태도다. 조건도 거래도 없는 추앙은 벨 훅스가 정의한 사랑에 가깝다. 구씨에게 “오늘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라는 간판 사진을 찍어 보냈는데 답이 오지 않자 미정은 이렇게 쓴다. “당신의 애정을 재지 않아도 돼서 너무 좋아요. 그냥 추앙만 하면 되니까 너무 좋아요.” 대가를 바라지 않으니 주도권은 오로지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 그런 사랑은 자유롭고 평화롭다.
“사랑은 저절로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행동할 때 생기는 정서적인 것이다.”(벨 훅스, <올 어바웃 러브>) 거래하지 않는 사랑은 맨몸으로 할 수 있다. 지금, 당장 추앙할 수 있다. 미정 가족과 구씨가 고추를 따는 여름날, 미정의 모자가 도랑 너머로 날아간다. 구씨는 100m를 11초로 달리는 속도로 도움닫기 하더니 날아올라 미정의 모자를 주워 온다. 이 장면을 본 시청자는 “구찌보다 구씨”라며 그에게 반했다. 추앙은 아이스크림과 라면을 타고 온다. 그 안에 존중과 응원이 있다면 무엇이건 추앙이다. 가장 가난한 자도 맘껏 추앙할 수 있고, 추앙하는 순간 자기 이름조차 말할 수 없는 자도 날아오를 수 있다.
추앙이 존재 자체를 향한 응원인데 추앙한다면서 다른 존재가 되라고 요구하는 건 모순이다. 미정은 구씨의 이름도 묻지 않는다. 술을 끊으라고도 하지 않는다. 오지랖 창희가 구씨 방을 가득 채운 빈 소주병을 치운 날, 미정은 말한다. “인간을 갱생시키겠다는 의지가 너무 오만해.” 구씨가 미정에게 옛 남자친구가 가로챈 돈을 받아다줄까 물었을 때, 미정은 구씨에게 화낸다. 구씨가 할 일은 미정이 자신으로 꽉 차올라 스스로 행동할 수 있을 때까지 다만 추앙하는 것이다.
미정이 구씨에게 추앙하라고 한 날, 구씨는 미정에게 그러면 자신이 변할 수 있냐고 물었다. “봄이 되면 당신도 나도 다른 사람이 돼 있을 거예요. 확실해요.”(미정)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어떤 ‘대상’을 긍정하려는 정열적인 욕구”라고 책 <자유로부터의 도피>에 썼다. 사랑은 그런 욕구가 드러나는 ‘태도’다.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은 세상 전체를 향한 태도에도 드러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태도는 일관된 것이니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타인을 사랑한다는 건 모순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이 주체성을 지키며 대상과 결합하게 해준다고 했다. 자신을 지키며 세상과 연결되는 것이다.
미정의 ‘돌파’는 회사에서도 계속된다. ‘은따’ 삼인방이 뭉쳐 ‘해방클럽’을 만든다. 그 모임에서 미정은 이렇게 말했다.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혼자라는 느낌, 버려진 느낌에 시달리는 게 아닐까? 좋기만 한 사람 한번 만들어보려고 해요.” 구씨의 추앙을 받으며 미정은 세상에 말 건다. 옆자리 동료에게 “향기가 좋다”고 하자 동료는 미정에게 핸드크림을 발라준다. 말이 없던 구씨는 용달차를 몰고 가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을 향해 “파이팅”이라 말하고, 동네 공터에 사는 유기견들에게 소시지를 던져준다.
드라마 속 시간은 한여름, 미정과 구씨의 세계는 넓어지고 색깔을 찾아가고 있다. 벨 훅스나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자신과 타인의 성장을 위한 실천’이라고 했는데, 그 성장은 뭘까? “자발적으로 행동할 수 없거나, 순수하게 느끼고 생각한 바를 표현할 수 없거나 그 결과 타인이나 자기 자신에 대해 거짓 자아를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되거나 하는 일이 열등감이나 하찮다는 느낌의 근원이다. …자기가 자기가 아닌 것처럼 부끄러운 일은 없으며, 자신의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자부심과 행복을 주는 것도 없다.”(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그에 따르면 사랑은 상대가 자신이 감각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도록, 그래서 자기 자신이 되도록 응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미정의 ‘추앙하라’가 ‘저항하라’ 같다. 회사에 잘 적응하려면, 유명 대학에 가려면, 결혼하려면, 사회에서 요구하는 규격에 자신을 맞춰야 할 것 같은 세상에서 추앙은 개별성을 응원한다. 성실한 노동자, 소비자가 되라는 세상에서 이 드라마는 자꾸 ‘너 자신’이 되라고 한다. 미정의 ‘해방클럽’ 멤버인 한 부장은 이렇게 말한다. “하루를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데 계속 쫓기는 거야. 내 템포로 가는 게 나에게 가장 필요한 해방이 아닐까.” 조건 없는 추앙을 주고받으면 자신이 또 타인이 시간에 쫓기기엔 존엄한 존재임을 확인하게 된다. 존엄한 존재의 자각이야말로 잘 길든 노동자와 소비자만 필요한 자본주의가 가장 두려워하는 적이 아닐까. 그러니 사랑이야말로 저항이다.
<나의 해방일지>를 볼 때마다 나는 당장에라도 조건 없이 추앙하고 싶어진다. 사랑이 꼭 로맨스일 필요는 없을 거다.(구씨가 지나치게 잘생겨 추앙하기 너무 쉽다는 게 이 드라마의 단점이다.) 친구를, 가족을, 반려견을 추앙할 수 있다. 추앙할 수 있는 대상은 널렸다. 스피노자가 그랬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신의 현현이라고.
김소민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저자·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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