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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 응답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닿기 위하여 [21WRITERS①]

[한겨레21이 사랑한 논픽션 작가]<회사가 사라졌다> 쓴 희정 작가 인터뷰
등록 2022-03-27 15:45 수정 2022-03-28 09:21
사진=이정우 선임기자

사진=이정우 선임기자

희정(41) 작가는 자신을 ‘기록노동자’로 소개한다. 노동에 관한 르포르타주를 쓴다. 일하다 죽고 다치는 사람들, 일터에서 직업병을 얻은 노동자의 투병과 죽음을 적지 않게 기록해왔다. 기록노동의 시작은 2010년 2월, 이화여대 청소노동자 투쟁 현장에서였다.

당시 청소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있었고, 모든 것은 비밀리에 진행됐다. 노조 설립보다 해고가 먼저 이뤄지는 일을 막아야 했다. 졸업 뒤에도 학교를 자주 드나들던 희정 작가는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학교에 다닐 때는 노동자-학생연대 활동을 하며 강의실보다 집회 현장에 있는 날이 더 많았지만, 학내 노동자에게 크게 주목해본 적이 없었다.

‘눈물’로 보도된 투쟁 현장, 노동자들은 “오늘이 제일 재미있어”

여러 매체에서 그들의 투쟁을 ‘눈물’로 보도했지만, 그는 달랐다. 매일 청소해야 하는 노동공간인 학교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처음으로 학생들과 밥도 먹고 연대의 시간을 나누며 “오늘이 제일 재미있어!”라고 말했고, 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다른 시선이 담긴 글은 여성주의 저널 <일다>를 통해 보도됐다. 그의 첫 기록 글이었다.

“<일다>를 시작으로 반도체 직업병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바로 연재를 이어갔어요. 그 글을 모아 첫 책인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이 나올 수 있었고요. 첫 기록 글 덕분에 글 쓰며 살 수 있게 됐습니다.”

그는 요즘 반도체 사업장 내 직업병 문제 규명을 위해 투쟁하는 비영리단체인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의 사무실에서 글을 쓴다.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한 노동자의 자녀들에게 생기는 질환을 직업병으로 인정받기 위해 어려운 싸움을 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은 책을 쓰고 있는데, 반올림에서 선뜻 사무실 공간 한편을 내주었다.

희정 작가에게 특별한 작업 공간은 없다. 지금처럼 글쓰기 강의를 다니고 기록노동자로 살며 시위 현장, 농성장 천막 등 아무 데나 앉아서 썼다. 더욱이 쉼 없이 써내는 작가 중 한 명이라 요즘에도 강의 갔다가 취재 사이 틈이 나면 주로 근처 카페에서 글을 쓴다. 긴 호흡을 가져가는 글을 쓸 때는 자료나 책 등을 모아놔야 해 여러 단체의 도움으로 작업실을 옮기며 썼다. 그렇기에 서울 구로구 구로동에 위치한 반올림 사무실 공간은 그에게 특별하다. 반올림은 상담실 공간을 깨끗이 청소해 그만을 위한 집필 공간으로 바꿔줬다.

“피해 당사자와 사건을 지나치는 일반인과의 거리가 굉장히 먼데 이 먼 거리를 이어주는 틈새 다리 구실을 하는 게 활동가라고 한다면, 반올림은 그 일을 굉장히 잘한 단체라고 생각해요. 저뿐만 아니라 반올림 일과 연대하는 모든 이에게 마음 품을 잘 내줘요. 그 힘으로 첫 책을 썼고 지금 책도 쓰고 있습니다.”

그를 만나러 간 반올림 사무실은 법률사무소 ‘노동과 삶’ 사무실 안에 있었다. 법률사무소가 반올림에 공간을 내주고 반올림이 다시 희정 작가를 위해 공간을 내준 것이다. 문을 열자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지면서 반도체 공정의 직업병을 세상에 처음 알린 고 황유미씨의 조각상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희정 작가가 유가족을 통해 취재한 첫 번째 반도체 직업병 노동자다. 이 특별한 공간에서 2022년 3월5일 그의 삶에 기록노동이 어떤 의미인지 들을 수 있었다.

사진=이정우 선임기자

사진=이정우 선임기자

기록노동은,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과정

“기록하러 가서는 여전히 꺼내지 못한 말, 묻지 못한 질문을 가지고 되돌아온다. 하지만 더는 홀로 끙끙대지 않는다. 나 혼자 풀 수 없는 문제임을 이제는 안다. 기록노동이라는 것을 놓지 않는 한, 내가 묻지 못한 말에 자기 방식으로 결국 답을 만들어가는 이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움직이고 나아가고 살아간다. 그걸 인정하고 지켜보는 일이 나의 노동이 된다. 그들의 시간을 훔쳐보며 나 역시 아주 살짝 단단해진다. 그러니 오늘도 살아가고 싸우고 견뎌내는 일을 기록한다.” -<두 번째 글쓰기>

희정 작가에게 ‘기록노동’은 자신을 가장 자기답게 만드는 과정이다. 자기 이야기를 하기보다 타인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이 적성에 맞는 점도 있다. 하지만 이 일을 계속하면서 깨달았다고 한다. 타인을 기록한다는 건 그들이 자기 삶을 해석하고 편집해나가는 과정을 보는 것이라고. 그러면서 기록자 역시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해석하고 편집할지 고민할 수 있다고.

일례로 책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를 쓸 때는 ‘도대체 나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 또는 ‘나다운 노동을 하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에 부딪혀 있었다. 그는 자기다운 삶을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만나 기록하면서 그 답을 찾아갔다. 오랜만에 쓴 단행본이었고 취재도 어느 때보다 어려웠기에 인터뷰이들이 전해준 깊은 이야기를 올곧이 담아냈다고 자신할 순 없지만 그의 인생에 중요한 의미를 던져준 책으로 남았다.

작가에겐 돋보이는 기획력, 수려한 문장력 등 여러 자질이 필요하다. 희정 작가가 ‘아, 내가 작가로 살아가는구나’ 느끼는 순간은 이처럼 인생의 과제를 글로 풀려고 하는 자신을 마주할 때다. 살면서 마주하는 여러 문제와 과제를 글로 풀고 해결하려는 면모를 만났을 때 말이다.

*희정, 살아가고 싸우고 견뎌내는 일을 쓰는 기록노동자 [21WRITERS②]로 이어집니다.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1777.html

출간 목록

희정 작가는 직업병에 시달리는 반도체 노동자와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아카이브, 2011), 한 해 2천 명이 일하다 죽는 사회를 기록한 <노동자, 쓰러지다>(오월의봄, 2014),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인 성소수자들의 노동을 추적한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오월의봄, 2019), 자기 자신의 노동에 대해 쓴 에세이 <두 번째 글쓰기>(오월의봄, 2021) 등을 썼다. 공저로는 송전탑을 반대하는 밀양 주민들의 목소리를 기록한 구술집 <밀양을 살다>(오월의봄, 2014), 세상이 소외시킨 사람과 사건을 다른 관점으로 기록하려 애쓰는 싸우는여자들기록팀 ‘또록’과 펴낸 <회사가 사라졌다>(파시클, 2020) 등이 있다.

작은 한숨을 놓치지 않기

기록의 팁

1. 녹음 기계는 최소 2개 이상 사용할 것

희정 작가는 인터뷰할 때 늘 긴장한다. 녹음이 제대로 되지 않을까 불안하다. 누군가 자신을 인터뷰할 때도 녹음할 정도다. 그는 여러 곳에 글쓰기 강의를 다니면서 항상 첫 번째로 인터뷰할 때 녹음 기계를 최소 두 개를 이용하라고 강조한다. 그는 보통 휴대전화와 노트북으로 녹음한다. 이렇게 했는데도 녹음되지 않았거나 문제가 생겨 녹음본이 날아간다면?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찾아갈 준비를 하면 된다고.

2. 인터뷰 녹음파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듣기

인터뷰를 자주 하는 이들에게 구세주가 등장했다. 음성기록을 텍스트로 자동 변환해주는 인공지능(AI) 음성기록서비스가 바로 그것이다. 희정 작가 역시 이 서비스를 통해 녹음파일을 텍스트로 변환하는데, 업데이트할 수 있는 최적 용량에 맞춰 60~70분 단위로 끊어 녹음한다. AI 서비스가 있지만 그는 녹음파일을 최소 한 번은 처음부터 끝까지 듣기를 권장한다. 단어 오류를 잡아내야 하는 이유도 있지만 인터뷰이의 작은 한숨, 떨림, 웃음소리 등 작가가 놓치면 안 되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3. 현장에 자주 가기, 전문자료 읽기

희정 작가의 취재 원칙 중 하나. ‘능동적으로 인터뷰하지 않고 인터뷰이의 말을 그냥 그대로 들으면 뻔한 서사가 나올 수밖에 없다’. 고통만 나열되는 취재가 이어지면 말하는 사람도, 기록하는 사람도 지친다. 이에 그는 첫째, 자주 찾아가서 계속 옆에 있는 것을 권한다. 한번 만난 기자에게는 힘들어 죽겠다는 얘기를 하지만, 같이 밥을 나눠 먹고 시간을 보낸 사람에게는 왜 자신이 싸움을 이어가는지 속 깊게 얘기한다.

둘째, 관련 사건에 관한 전문지식과 시스템 분석을 담은 논문, 책 등 공부를 통해 인터뷰를 보충할 것. 전문자료는 인터뷰 때 들었던 이야기에만 갇히지 않고 새로운 대안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선을 제공한다. 사건 관련 활동가와 당사자의 글도 찾아본다.

4. 초고는 내 글이 아니다

희정 작가가 가장 강조한 팁은 초고는 내 글이 아니라 생각하고 부끄러워하지 말고 최대한 남에게 보여주라는 것. 여러 사람이 모여 서로의 관점과 시선을 빌리는 합평도 좋은 방법이다. 비슷한 글을 쓰거나 활동하는 동료들과 글을 나누는 작업 방법도 추천했다.

5. 주요 키워드 적은 메모판 이용

그는 긴 호흡의 글을 쓸 때마다 큰 메모판에 중요한 단어를 적은 메모지를 여러 개 붙여둔다. 노동 관련 글을 많이 쓰다보니 여러 사건을 한꺼번에 다룰 때가 많은데, 이렇게 메모지로 주요 단어를 정리해놓으면 사건별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는 데도 도움이 되고 사건과 다른 사건의 연결고리를 파악하기도 쉽다고 전했다.

채혜원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저자 chaelee.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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