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친구 쩔해주느라 렙 손실 남.”
게임에서 레벨 높은 유저가 레벨 낮은 유저의 레벨 업을 도와주려 함께 다니다가 정작 본인 레벨 업은 못한 상황을 말한다. 몇 달 전만 해도 이런 게임 용어가 그저 외국어로 들렸는데 이젠 제법 구사할 줄도 안다. 갑자기 게임 관련 업무를 맡으면서 매일같이 게임 커뮤니티에 드나들고 게임 영상을 챙겨보며 댓글까지 샅샅이 훑은 덕이다. 무언가와 빨리 친해지려면 언어를 익혀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도 여전히 게임과 낯을 가린다. 영어를 체계적으로 배운 적 없는 한국인이 한국인 없는 마을에 떨궈져 생존 영어가 는 것 같은 기분이다. 말은 잘 통하는데 본질을 이해한 것 같지 않아 고민하던 와중에 이 영상을 만났다. <게임 메이커스 툴킷>의 ‘라스트 가디언 그리고 게임만이 가진 언어’(사진)라는 영상이다. 이 채널은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 처지에서 우리가 왜 게임에 빠질 수밖에 없는지 원리를 깊이 있게 알려준다. 말하자면 맛깔나게 잘 먹는 먹방 유튜버가 아니라 음식을 분자 단위까지 연구하고 분석하는 셰프의 유튜브인 것.
‘더 라스트 가디언’은 소년과 토리코가 서로 의지하며 험난한 여정을 헤쳐가는 게임이다. 플레이어가 조작하는 소년은 토리코의 도움 없이는 적과 싸워 이길 수 없다. 크기나 힘으로만 보면 토리코가 소년 쩔해주느라 렙 손실 나는 상황 아닌가 싶지만, 이 둘은 상호보완적이다. 소년은 토리코가 무서워하는 스테인드글라스를 깨주고, 상처를 보듬고, 배고픔을 달래주며 교감한다. 처음엔 제멋대로였던 토리코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이 게임의 묘미다.
만약 소년이 적에게 붙잡혀 스테인드글라스를 깰 수 없다면? 당연히 토리코도 소년을 구하러 올 수 없다. 여러 스테이지를 거쳐 플레이어가 학습한 게임의 규칙이다. 그런데 중간에 딱 한 번, 토리코가 두려움을 무릅쓰고 스테인드글라스를 깔아뭉개버린다. 버그가 아니다. 능력치 강화도 아닌 게, 이후엔 원래대로 돌아온다. 동료를 구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용기를 내 규칙을 깬 것이다. 영상을 추천한 진성훈님은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진하게 감동한다.
“게임은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매체잖아요. 플레이어가 그간 토리코와 충분히 상호작용을 한 덕에 토리코가 규칙을 깨면서까지 우정을 선택하는 순간을 경험한 거죠. 플레이 사이에 컷을 삽입하는 게 아니라, ‘상호작용’과 ‘규칙’이라는 게임 고유의 언어로 플레이 안에서 구현한 게 인상 깊었어요.”
성훈님은 <겜피레터>를 통해 일상을 게임화(Gamification)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게임에 열광하게 하는 요소를 뽑아 이게 어떻게 밈, 투자, 만화, 마케팅 등에 적용되는지 보여주는 뉴스레터다. 이런 글을 연재하려면 게임 원리를 나만의 버전으로 계속 갈고닦아야 한다. 그렇기에 게임의 언어를 이토록 유려하게 구사한 사례에 더 감흥이 크지 않았을까. 성훈님이 덧붙인다. “이제 게임산업이 영화와 음악을 합친 것보다 크잖아요. 요새 메타버스도 흥하고 셧다운제도 폐지됐고요. 게임을 일상적으로 플레이하며 자란 세대라면 게임의 언어를 기본값으로 생각하지 않을까요?”
게임의 언어를 이해한다고 유행어부터 들여다보던 게 새삼 민망해졌다. 언어를 이해한다는 건 특정 표현을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원리를 체화하는 것. 급한 마음에 빠른 길을 노렸지만 게임이야말로 진득히 체험해야 한다. 게임은 읽고 보는 미디어가 아니라 손과 몸을 움직이는 ‘촉각 미디어’니까. 당장 성훈님에게 닌텐도를 빌리기로 했다. 모처럼 게임이 하고 싶다.
김주은 유튜브코드 기획자
*라스트 가디언 그리고 게임만이 가진 언어
https://www.youtube.com/watch?v=Qot5_rMB8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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