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 오늘 바빠요? 안 바쁘면 이따 대추 좀 같이 털어요.” ‘농달’이 말했다. 처음엔 잘못 들었나 했다. 경기도 포천 집에 처음 입주한 지난해 이맘때, 이른바 ‘대추 파동’이 있었다. 마을엔 대추나무가 많다. 마당 안에 심어져 주인이 분명한 것도 있지만 대개는 누가 따도 아무렇지 않은 길가에 있다.
그 대추나무는 우리 집에 더 붙어 있었다. 언제 심었는지 모를 아름드리나무의 열매는 풍성했다. 나무 한 그루에 대추가 그토록 많이 열리는지도 처음 알았다. 보면서도 신기했다. 생전 대추라곤 삼계탕에 들어가는 무엇이라고만 알았는데, 생대추의 맛은 싱그럽고 달았다. 오며 가며 한 움큼씩 따 먹었다. 애들한테도 먹어보라고, 서울에선 이런 것 못 먹는다고 내심 종용했다. 몰랐다. 골목 건너편에서 그 모든 과정을 농달이 조용히 노려보듯 지켜보고 있는 줄은.
태어나서 이렇게 대추를 많이 먹은 적은 없다 싶던 날의 다음날, 아침부터 농달네가 부산했다. 농달은 딸도 아들도 많구나 했는데, 해가 창창해 뜨거워질 무렵 그 모든 자식이 모여 대추를 털었다. 아들이 장대로 나무를 쳤고 나무 아래 너르게 펼쳐진 돗자리 위로 대추가 우수수 떨어지면 딸들은 익은 것, 풋풋한 것 가리지 않고 주워 담았다. 볼만한 광경이었다. 캠핑의자에 앉아 느긋이 보고 있는데, 들으란 듯 험담이 시작됐다.
“아무리 서울 사람이라도 경우가 있어야지. 남의 대추를 왜 따 먹어. 서로 얼굴도 알고 그래야 대추도 먹는 거지. 내가 먹으라고도 안 했는데….” 농달은 내가 대추 따 먹는 꼴이 싫어, 화급히 자식들을 부르고 보란 듯이 위력 시위를 한 것이었다.
분했다. 분하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서울 사람의 대응을 보여줘야지 다짐했다. 폭풍 검색으로 대응책에 골몰했다. 일단 등기부등본 열람이 우선이지. 저기요, 할머니 그 대추나무가 심어진 땅은 한국자산관리공사 소유의 국유지고요, 할머니가 정상적으로 매년 임대 신청을 갱신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대추나무는 누구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할머니에게 ‘과일 수취권’이 있다고 하면 저에겐 담장을 넘어온 가지에 대한 ‘방해 제거 청구권’이 있습니다. 담을 넘어온 나뭇가지를 잘라낼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나무를 아예 잘라버릴까요?”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시골 인심이라고 부르는 것은 처음부터 작동하지 않는다. 외지인은 경계의 대상일 뿐이다. 시골 일에 밝지 않은 사람은 물정을 잘 모르는 것이다. 그곳 질서는 이미 정리돼 있는데 여기에 잘 스며들지 못하는 사람에게 호의가 베풀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일방적인 태도일 뿐이다. ‘대추 파동’ 이후 1년. 대추 터는 일에 동참을 요구받은 것은 커뮤니티 일원이 됐다는 승인일까. 올해 대추는 외지에 사는 농달의 자식들이 아닌 대추나무를 두고 이웃하는 사람들이 모여 털었다. 인천에서 이제 막 이사 온 사람, 시내에 나가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 그리고 서울에서 주말에만 오는 우리가 모여서. “올해는 대추가 실하지 않아. 지난해엔 좋았는데, 내년엔 더 괜찮을 거야.” 농달의 대추농사 격년 풍년설은 가짜뉴스일까, 아닐까. 대추 달아지라며 분리배출 않고 대추나무에 과일 껍질 버리는 농달을 더는 미워하지 않는다.
글·사진 김완 <한겨레> 탐사기획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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