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차 나아지겠지 하며 기다렸지만, 이 지독한 역병은 1년 이상 우리 삶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다. 음악가로서 관객을 만난 지도, 관객이 되어본 지도 그만큼 오래됐단 소리다. 이전에는 공연을 마치고 무대 위에서 박수를 받을 때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일상이 되니 감흥이 무뎌졌던 듯하다. 커튼이 닫히자마자 빛의 속도로 머리에 꽂힌 100여 개의 핀을 뽑고 가발을 벗어던지고 의상을 풀어헤치며 마치 쥬만지의 동물 떼처럼 무대를 벗어났다. 손 아프도록 길고 긴 박수를 쳐주던 소중한 관객이 사무치게 그리운 요즘이다. 특히 이탈리아 관객은 열정적이기가 둘째가라면 서럽기에 부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보통 오페라가 아닌 다른 클래식 공연들은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지 않는 것이 약속이다. 중간에 미칠 듯한 감동이 밀려와도 꿀꺽 참고 모든 악장을 마쳤을 때 몰아서 박수를 쳐야 한다. 하지만 오페라는 막이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치고, 가수들도 커튼 밖으로 나와 인사한다. 유명한 아리아가 나올 때면 막이 끝나지 않아도 박수갈채가 쏟아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렇듯 공연자와 관객 사이가 한 걸음 더 가까운 장르라 할 수 있다.
거기다 내 모국어로 하는 공연인데다 음악적으로 뛰어나다? 그러면 이건 못 참지 하며 이탈리아 관객은 극에 한층 더 깊게 들어온다.
재미있는 예를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같은 가수의 같은 공연을 영국 런던과 이탈리아 파르마 두 곳 반응을 편집했다. 뻐렁치는 에너지가 좋아 파일을 받아 한동안 아침 기상 알람 소리로 썼던 짧은 음원이다. 전설적인 테너 프랑코 코렐리가 오페라 <토스카>에서 ‘비토리아’(Vittoria·승리)를 외치는, 몇 마디 안 되지만 고음의 기량을 뽐낼 수 있는 부분이다. 분명한 건 여기는 가수가 독창을 마치고 박수를 받게끔 만들어진 곳이 아니고 여러 명이 무대에서 티키타카 하며 극이 이어지는 부분이라는 사실이다. 런던에서 공연한 <토스카>의 이 부분을 들어보면 코렐리가 엄청난 고음을 뽑아낸다. 기가 막힌 테크닉이다. 하지만 한두 명이 친 듯한 박수를 두세 번 짝짝하다가 이어지는 음악과 주위 눈치에 박수는 멎어선다.
자, 이제 같은 장면이 이탈리아 파르마극장에서 펼쳐진다. 코렐리의 끝내주는 ‘비토리아’ 두 번이 들려온다. 굳이 두 번 중 더 잘한 걸 고르라고 나에게 묻는다면 ‘런던이요’라고 할 텐데, 문자 그대로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에 정신을 못 차리게 된다. 물론 박수 소리에 묻혀 뒤이어 진행되는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유감일 수 있겠지만, 이렇듯 이탈리아 관객은 참지 않는다.(QR코드1 참조)
가수나 지휘자, 무대연출이 맘에 들지 않으면 비난도 가차 없다. 커튼콜 때 무대 위에 오른 그들에게 욕설과 야유도 대단하다.
2006년 스칼라극장에서 <아이다> 공연 을 할 때 유명 테너 로베르토 알라냐가 ‘청아한 아이다’(Celeste Aida)를 부르자마자 이어진 야유에 화가 나 즉시 무대를 뜬 일화도 유명하다. 음악은 이어지는데 사라진 테너, 라다메스와 듀엣을 불러야 하는 암네리스 공주의 동공이 몹시 흔들릴 때쯤 의상을 입을 틈도 없던 알라냐 커버 가수가 평상복을 입고 이집트 무대 세트로 급히 투입돼 간신히 극을 이어갈 수 있었다.(QR코드2 참조)
어느 완벽주의자의 박수 청탁스칼라극장에서는 한 오페라 작품을 올리면 보통 8회 정도 공연한다. 어떤 유명 베이스 가수는 맡은 역할이 잘 맞지 않았는지 전성기 기량을 기대하고 온 관객에게 실망을 안긴 모양이다. 공연마다 쏟아지는 “부우!”(이탈리아 관객이 야유 보낼 때 주로 내는 소리)에 그는 회차 막바지 때는 커튼콜 무대에 올라가 인사하지 않겠다며 연출 스태프와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이렇듯 공연 중 관객의 따끈한 반응이 중요하기에 이탈리아에서 공연하는 어떤 음악가들은 사람들을 섭외해 곳곳에 심어 환호성을 부탁하기도 한다는 공공연한 비밀이 나돈다. 겨우겨우 평타 수준의 공연을 한 누군가 오버스러운 큰 박수를 받으면 무대 뒤에서 동료들은 이야기한다. 저 사람 일가친척 다 데려왔나보다. 간혹 이미 명성이 있음에도 표를 돌리고 박수 청탁을 하는 완벽주의자가 있을 정도다.
매수된 박수로 ‘찐’팬의 귀를 속일 수 있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서슬 퍼런 필치의 비평가들보다 진짜 팬들의 귀는 더욱 예리하다. 공연이 끝나면 극장 왼편에 있는 작은 아티스트 전용 출입구는 사인을 받거나 사진을 찍고 싶은 관객으로 복작인다. 유명 가수나 지휘자들에게는 팬에게 둘러싸이는 귀갓길이 일상이겠지만 신인급에게는 꿈이렷다. 그날 저녁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 공연이 있었다. 커튼콜을 마치고 대기실에 들어가 분장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고 극장 밖으로 나오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린다.
곱게 차려입은 우아한 시뇨라(부인) 한 명이 공연 포스터를 돌돌 말아 손에 쥐고 누군가를 기다린다. 유명 인기 가수들은 이미 팬들과 사라지고 거의 텅 빈 아티스트 출입구. 뒤늦게 나오는 한 가수에게 그 시뇨라가 사뿐히 다가가 묻는다.
“당신이 레포렐로(주인공 돈 조반니의 하인 역할)인가요?” 가수는 사인을 해줘야 하나 생각하며 기쁘게 대답한다. 하하 제가 가수 아무개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오늘 공연에서 레포렐로를 한 게 맞지요?”라며 그 부인은 거듭 확인한다. 가수는 우쭐거리며 ‘아무렴 저라니까요’라고 하는 찰나, 우아한 부인의 사자후가 아티스트 출입구에 울려퍼진다.
“Si vergogni!!!”(부끄러운 줄 아세요.)
객석에서 던지는 야유나 환호가 성에 차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연주자들의 퇴근길에까지 와서 확실하게 표현한다.
이탈리아 관객의 이런 열정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생각해본다.
대다수 오페라 작품이 그들의 언어로 쓰였기에 자막이라는 절차 없이 연주자의 마음에서 관객의 마음으로 연결이 빠른 점. 이곳에서 거리를 걷다보면 지금은 풀이 무성하고 길고양이들이 뛰노는 크고 작은 고대 로마 극장 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렇듯 예로부터 이어진 공연과 극장 문화가 그들의 디엔에이(DNA)에 새겨 있는 것이 아닐까.
요즘 젊은 애들은 오페라를 안 들어 클래식을 모른다며 많은 이탈리아의 고전음악 애호가들은 걱정 섞인 넋두리를 한다. 하지만 어느 나라 청년들이 오페라 시즌 개막작 표를 구하기 위해 초겨울 날씨에 텐트를 치고 밤새워 줄을 설까? 피 끓는 이탈리아 관객의 문화 대물림을 희망차게 지켜본다.
밀라노(이탈리아)=글·사진 박사라 스칼라극장 성악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스칼라극장 성악가로 활동하는 박사라씨가 이역만리에서 벌어지는 일을 유쾌하게 집필하는 칼럼입니다.
*코렐리의 Vittoria 리액션 런던VS파르마
(https://youtu.be/KqzZtMMylYw)
*알라냐의 무대탈출 2006 스칼라
(https://youtu.be/AxyBxbGF-Q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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