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에스트로는 처음 만났을 때 이미 90살을 훌쩍 넘긴 분이었다. 1920년생인 테너 안젤로 로 포레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만한 나이였다. 화장실이라도 한번 다녀오려면 열 걸음 거리도 한참 걸렸고 가끔 반복적인 발성 연습을 할 적에 종종 조용히 잠이 들기도 하셔서 행여 돌아가신 건 아닐까 놀란 마음에 흔들어 깨운 적도 있다. 그럼에도 테너 혹은 소프라노같이 고음역을 부르는 제자들의 노래가 맘에 들지 않을 때면 ‘고음은 이런 것이다’ 하며 앉은자리에서 하이C를 뻥뻥 내주었다.
프로 성악인으로서 커리어를 가장 낮은 음역대인 베이스로 시작해 바리톤, 나중에 테너까지 했으며 클래식 음악에 관심 없는 사람들도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걸출한 대가들과 협업해왔다. 레슨을 할 때마다 옛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려주어 제자들은 자다가도 옆구리를 쿡 찌르면 안젤로 선생님의 연대기를 읊을 수 있는 지경이 됐다.
성악은 선생과 제자의 케미(조화)가 상당히 중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목구멍, 횡격막과 호흡 등을 화두 삼아 수업하는 까닭에 개떡같이 이야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합이 필요하다. 불행히도 내가 다니던 국립음악원의 담당 선생님과는 그것이 좋지 않았다. 학점도 따야 하고 졸업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밉보이지 않으려면 수업을 빠질 수 없지만, 그 한 시간이 고통스러웠다. 레슨실 문을 닫고 나올 때면 내 목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어느 날은 그렇게 패전한 해군의 돛대 같은 목으로 안젤로 선생님의 레슨에 뒤이어 가야 했다. 노래는커녕 말조차 하기 힘든 상태였으나 당일에 레슨을 취소할 순 없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그는 자신의 옛날이야기도 반복적으로 하는데 성악에 대한 조언은 어떠하랴. 1년을 가든 10년을 가든 그의 조언은 늘 똑같은 서너 가지가 전부였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염불 같은 조언 뒤에 그날 아팠던 목도 나아지고 심지어 안 나던 고음까지 났다. 할렐 루야.
집안일과 식사 등을 봐주던 분이 그만두자 선생님은 실버타운으로 거처를 옮겼다. 은퇴한 음악인들이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주세페 베르디가 1902년에 설립한 ‘까자베르디’(베르디 음악가를 위한 휴식의 집)이다. 은퇴한 음악가를 위한 거처이기에 작은 연주홀과 연습실도 마련돼 있었다. 이곳에서 연주할 때마다 왕년에 한 노래 하시던 소프라노 할머니들의 촌철살인급 비평을 피할 수 없었고, 더불어 칭찬은 여느 다른 연주 때보다 더욱 달콤했다. 한국에도 이런 곳이 있으면 좋으련만.
노래가 너무 안 풀려 멘붕에 빠진 어느 레슨날이었다. 하다 하다 안 되어 빽 하고 소 뒷발에 밟힌 쥐의 비명 같은 고음을 냈다. 늘 느릿느릿 몽환적인 표정인 안젤로 선생님이 눈을 크게 뜨고 벌떡 일어나며 하시는 말씀. “밖에서 다 듣고 있다. 이상한 소리 실험하지 말고 정신 차려라.”
아하, 선생님 라이벌이 있었던 것이다. 서로의 제자들이 잘할수록 그날 식사 시간에 뽐낸다고 하셨다. “아까 들었지?” 하면서. 나중에 그 라이벌의 정체를 알고 나서 깜짝 놀랐다. 아흔이 넘은 소프라노가 부른 오페라 <춘희>의 아리아 ‘아디오 델 파사토’를 유튜브에서 듣고는 눈물이 줄줄 났는데, 바로 그분이 선생님의 제자 경쟁 상대인 리나 바스타였다.
안젤로 선생님이 살짝 질투하시길래 직접 레슨을 받지는 못하고 다른 친구 공부할 때 쫓아가서 청강했다. 노래만 듣고는 어딘가 연약하고 청초한 이미지의 할머니를 떠올렸으나 실제 만난 그분은 정반대 타입이었다. 눈꼬리가 한껏 올라간 고양이풍 선글라스에 알록달록한 패션과 카랑카랑한 음성. ‘열정’이라는 두 글자가 사람인 척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리나 선생님 성에 차게 노래하지 못했던 친구는 선생님 호통에 말로 뺨 맞은 거 같다며 볼을 어루만지면서 연습실을 나갔다. 후에 나는 리나 선생님께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에스트라, 소리를 유지하는 비결이 무언가요?”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별거 없다는 식으로 답했다. “매일 꾸준히 짧은 시간이라도 연습한다”고. 안젤로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매일 아침 눈뜨면 복근운동과 호흡을 연습한단다. 순간 나는 노래는 둘째 치고 이것이 장수 비결은 아닐까 짐작했다.
예술가의 길은 고독하다고 한다. 타고나야 한다고도 한다. 성악가로서 타고난 사람, 나는 과연 그런가? 항상 의심하며 살고 있다. 입만 벌리면 좋은 소리 뻥뻥 나는 사람, 분명히 나는 아니다. 엄청나게 고민하고 연습한 것이 몸에 생착할 때까지 반복해주어야 한다.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알 순 없지만…. 지오디(G.O.D.)의 노랫말이 꼭 내 마음이었다.
그러나 파바로티의 인터뷰를 보고는 못내 놀라웠다. 그야말로 입만 벌리면 금빛 태양의 소리가 나는 사람 아닌가. 그런 그도 매일 연습하며 단 하루만 걸러도 다음날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단다. 파바로티 같은 신급도, 아흔이 넘으신 선생님들도 매일 연습한다는데, ‘쪼렙’(낮은 레벨) 주제에 이런저런 핑계로 입도 뻥긋 안 하고 보낸 수많은 나날을 떠올리니 아찔해진다.
안젤로 선생님의 스튜디오 벽 한쪽에 걸린 액자에는 다음과 같은 베토벤의 명언이 걸려 있다.
“이 천상의 예술(성악) 스튜디오에 오는 자는 다음 덕목을 가져야 한다. 인내심, 근면함, 성실함,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소망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말인즉 성악도 덕목의 8할은 ‘존버 정신’이라는 것이다. 잔잔한 꾸준함. 반갑지 않은 손님인 슬럼프가 찾아와도 자신을 믿고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한다. 과연 이런 것이 성악 영역에만 국한될까 싶다.
2020년 5월, 안젤로 선생님은 만 100살을 채우고 두 달 뒤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내 곁으로 가셨다. 까자 베르디가 집에서 불과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음에도 극장에서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뒤로는 바쁘단 핑계로, 코로나19가 터진 이후로는 행여 병이라도 옮으실까 무서워 선생님을 자주 찾아가보지 못했다. 이 글을 선생님께 바치고 싶다.
밀라노(이탈리아)=글·사진 박사라 스칼라극장 성악가
*박사라씨는 유럽 클래식의 중심인 스칼라극장 아티스트입니다. ‘밀라노레미파솔’을 통해 음악 이야기와 함께 유쾌한 에피소드를 들려줍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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