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개월 전 클럽하우스라는 애플리케이션이 인기를 끌 때 그 기류에 합세해 ‘인싸’가 돼보려 몇 번 클럽하우스에 접속했다. 영어나 이탈리아어로만 하는 방에선 도무지 끝나지 않는 듣기평가 같은 스트레스가 있고 한국에서 개설된 방과는 시차가 안 맞았다. 그래서 찾아낸 곳이 유럽에 사는 한국인들이 만든 방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 방에 있던 붙박이들끼리는 친목이 형성됐기에 조용히 ‘눈팅’ 아닌 ‘귀팅’을 하다 이윽고 나를 소개할 시간이 찾아왔다.
이탈리아에서 공부를 마치고 일한다고 하니 귀국은 안 할 참이냐고들 묻는다. 사실 먼 훗날까지 계획을 세우는 스타일도 아니고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며 살았기에, “이제껏 낸 세금이 아까워서 은퇴하고 연금도 받고 오래오래 살려고요”라고 답했다.
얼마나 대단한 경제활동을 했다고 저런 소리가 나오나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처음 스칼라극장에 들어갔을 때 정직원이 아닌 객원 단원들은 개인사업자등록을 하고 세금을 내야 하는데 세율이 무려 40%에 육박했다. 계약서에 적힌 월급을 볼 때는 ‘이야, 드디어 고학생 인생 끝이로구나’ 했다가, 세금 떼이는 거 보고 놀라 아마 그때 돌출된 눈이 아직까지 들어가지 않은 듯하다.
극장 정직원이 된 뒤에는 회계사를 만나 어렵고 복잡한 서류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되고 깔끔히 계산된 월급명세서를 매달 받아볼 수 있다. 다만 거기에도 얼추 비슷한 세율이 적용된다. 세전 금액을 보면 부유한 기분이 들지만, 세후 금액을 보면 바짝 쪼이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은퇴 뒤 매달 월급만큼은 아니더라도 엇비슷한 연금을 받는다니 오래오래 살리라 하는 장수의 열망을 가슴에 다시금 아로새겨본다.
귀국 예정이 없다는 내 답변에 ‘해외 사는 한국인들의 방’ 사람들은 ‘아, 그러시구나’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앞다퉈 내 미래를 걱정해줬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 공부하고 일한다는 사람은 그네들 주위의 이탈리아인들을 예로 들며 이탈리아는 망했다, 제2의 그리스다, 미래가 없다, 인재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 다들 외국으로 나오고 있다, 네가 내는 세금 나중에 연금으로 다 못 받을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그중 이탈리아에 인접한 스위스 티치노에 있는 사람은 이탈리아인들이 죄다 이쪽으로 일하러 온다며 그들 흉을 봤다. 나만 해도 그쪽으로 연주하러 자주 가는 처지라 약간 찔끔함과 동시에 “니네도 그럼 이탈리아어 쓰지 마”(티치노에선 이탈리아어를 씀) 하는 유치원생같이 대응하려는 마음이 솟아올랐지만 겨우 참아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하겠다만 우다닥하고 달려드는 이탈리아 욕에 심통이 나서 슬그머니 그 방을 나왔다. 애증의 이탈리아는 까도 내가 까!
바늘구멍 오디션 통과하거나 해외로 나가거나전세계에서 이탈리아로 수많은 사람이 유학을 온다. 음악, 미술, 디자인부터 요리까지 많은 분야 가운데 특히 성악도 수가 상당하다. 그도 그럴 게 오페라극 대다수가 이탈리아어로 돼 있고 이 땅의 작곡가들이 썼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도 유학지를 이탈리아로 결정한 큰 이유이기도 했다. 최소한 노래할 적에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제대로 알고 싶었으니까.
이탈리아 국립음악학교(Conservatorio)들의 성악과에는 큰 도시일수록 이탈리아인보다 외국인의 수가 월등히 많다. 그중에서도 동양인의 두각이 크게 드러나는데, 교내 오페라를 할 때는 동양인, 특히 한국인이 주역을 꿰차는 일이 부지기수다. 우리는 오랜 세월 해외 클래식 음악계에서 큰 획을 그은 한국인 성악가를 많이 봐왔기에 그게 뭐 대단하냐 할 수 있겠지만 생각할수록 대단한 일이다. 한국에서 판소리로 창극을 하는데 평강 공주나 온달 역으로 서양인이 캐스팅돼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한 맺힌 소리를 걸출하게 뽑아낸다고 생각해보라.
그러나 이런 훌륭한 학생 중에도 행운은 극소수에게만 찾아가고 음악만을 업 삼아 살아가는 이는 적다. 많은 유학생이 본국으로 돌아간다. 돌아가서 그네들의 고국 사정이 좋다면 다행이겠다마는 한국 상황만 봐도 쉽지 않음이 한눈에 보인다. 무대도 기회도 적다. 이런 상황은 동양인 학생뿐 아니라 이탈리아 음악도에게도 마찬가지다.
음악학교에서 동문수학했던 학생만을 봤을 때 연주 활동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이는 손에 꼽는다. 최소한 다른 장르의 직업을 ‘투잡’ 하거나 아예 진로를 바꾸는 경우도 많다. 사랑하는 이 ‘예술’을 업으로 삼기 위해서는 바늘구멍 같은 오디션을 통과하든지 엄마 품을 떠나 해외로 나가는 것이 보통이니, 나를 서운하게 했던 클럽하우스 해외 거주 한국인의 방에서의 우려도 조금 맞는 이야기인 셈이다.
몇몇 이탈리아 친구를 예로 들어보겠다. 테너 친구 A는 황금 트럼펫 같은 소리로 큰 콩쿠르에서 입상했고 제법 굵직한 에이전시와도 계약 이야기가 오갔지만 불발됐다. 밀라노의 비싼 생활비를 감당하기 힘들어 기간제 음악교사로서의 삶을 몇 해째 이어오고 있다.
하프를 전공한 친구 B는 음악이 좋아 다니던 의과대학을 그만두고 하프에 올인했지만 여러 해째 급여를 제대로 주는 오케스트라에 들어가지 못해 다른 직종에 취업했다. 슬프게도 그는 요즘 하프를 건드리지도 않는다고 했다.
소프라노 친구 C는 여러 콩쿠르 입상 뒤 큰 극장 무대에도 서며 탄탄한 커리어를 쌓는가… 싶기 무섭게 터진 코로나19 유행으로, 2020년 한 해 수입이 0원이었다며 앓는 소리를 했다. 간간이 친구 A와 결혼식 축가 아르바이트를 다니며 월세를 충당하며 지내고 있다.
요즘 스칼라극장은 시즌 개막일(밀라노 성인 ‘성 암브로조’(Sant’Ambrogio)의 축일인 12월7일)을 앞두고 준비 열기가 뜨겁다. 그날의 개막 공연은 생중계되고 대통령을 비롯해 각계 유명인사들로 가득 찬다. 그날 좌석 가격은 3천유로(약 400만원)에 육박하지만 티켓 오픈과 동시에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온 밀라노에 개막 공연작의 광고 포스터가 나붙고 텔레비전과 신문에서도 광고가 쏟아진다. 당연히 주역 가수에 당대 최고 오페라 스타들이 캐스팅된다. 다만 여러 해째 반복되는 똑같은 가수들의 출연이 약간 지루하다는 비평가들의 의견이 심심찮게 거론된다. 비단 스칼라극장 시즌 개막작의 문제만이 아닐 것이다. 어지간한 규모의 극장에는 대형 기획사 서너 곳이 단단히 연결돼 있어, 그 기획사들 소속 가수 위주로 출연이 결정되는 실정이다.
예술계의 빈익빈 부익부는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다만 그저, 훌륭한 음악도들이 최소한의 숨을 쉴 만한 구멍이 만들어지면 좋으련만 하는 바람이다. 덧붙여 힘내라 이탈리아여, 망하지 말아다오. 나 연금 타야 한다!
밀라노(이탈리아)=박사라 스칼라극장 성악가
*박사라의 밀라노레미파솔은 이번호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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