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하루 전날 총리허설을 위해 무대 위에 섰다. ‘우리 정말 마스크 벗어도 되는 거야’ 하며 설레어하는 눈동자 중 몇몇은 이미 눈물이 차올랐다. 마침내 마스크를 벗고 노래를 시작했다. 더욱 정확히 들리는 발음과 강약 조절부터 극장 구석까지 닿는 소리의 울림까지…. 이전엔 껍질도 안 벗긴 하드를 빨아먹다가 드디어 시원하고 달콤한 맛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설레발 금지. 우리는 이미 2020년 1차 록다운(봉쇄령) 끝에 잠들었던 극장의 장막을 걷어 올리고 ‘공연을 시작합니다!’ 하고 나름의 방역 지침을 세워 연주를 재개했으나, 약 두어 달 만에 극장 안에 대규모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다시금 기나긴 침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특히 공연할 때 마스크를 벗어야 했던 파트에 확진자가 집중됐다. 제1343호 참조) 그 뒤로 무대 위가 아닌 객석에서 엄청난 거리 두기와 마스크 착용을 한 채 연주를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이제는 무엇이 달라졌기에 마스크를 벗고 노래할 수 있는 걸까?
일단 마스크를 늘 벗는 게 아니다. 연습 때 착용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극장 입장과 동시에 무조건 써야 한다. 공연이나 총연습 때 마스크를 벗어야 하는 날은 그 직전에 극장 내에서 검사해 음성 판정을 받아야 한다. 이외에 전 극장 직원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두세 차례씩 코로나19 검사를 계속했다. 2020년 가을 극장 내 대규모 확진 때 걸렸던 사람들은 한두 달에 한 번씩 항체 검사까지 한다. 고열이 나고 폐렴을 앓는 등 많이 아팠던 동료들일수록 항체 수치가 굉장히 높았는데, 6개월이 지나도록 수치가 잘 떨어지지 않더라. 그런 사람들은 주치의와 상의한 뒤 두 번 맞아야 하는 백신을 1회로 줄이기도 했다.
백신접종도 우리가 마스크를 벗을 수 있던 큰 이유다. 주마다 상황이 조금씩 다르나, 롬바르디아주의 고령층은 이미 봄에 2차 접종까지 마쳤고 젊은 지인들도 거의 2차 접종이 끝나가고 있다. 맨날 느려터졌다고 흉봤던 이탈리아가 이것만큼은 이들의 자랑인 자동차 페라리, 람보르기니급 속도를 보여줬다. 백신을 맞으러 갔을 때 어마어마한 대기줄이 앞에 보이기에 ‘또 몇 시간 기다려야겠구나’ 하고 낙심했는데 웬걸, 의료카드 접수부터 간단한 의사 면담, 접종 등의 순서가 쫙쫙 빠르게 흘러가는데 그 순간 여기가 한국인가 싶었다. 그렇게 내 앞에 50명도 넘는 대기번호가 있었으나 나는 10여 분 만에 백신을 맞았다.
2021년 7월 어느 날, 스칼라의 공연 포스터에 솔리스트로서 이름을 올려 개인적으로 몹시 영광스러운 연주를 하게 됐다. 더불어 드디어 마스크를 벗고 공연할 수 있어 두 배로 행복한 하루였다. 그러나 독창자로서 스칼라 데뷔를 축하해주러 온 고마운 친구들과 연주를 마치고 뒤풀이 같은 여흥은 할 수 없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 저녁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 2020’에 이탈리아가 영국을 상대로 결승전을 치르기 때문이다.
끝나자마자 자리를 뜨는 연주자·관객우리 공연은 저녁 8시 시작, 경기는 밤 9시에 시작이다. 연주가 무르익어가고 관객은 음악에 흠뻑 젖어들어간다. 그러나 9시가 넘어가자 몇몇 관객은 물론 연주 진행을 돕는 직원들도 흘끔흘끔 휴대전화를 쳐다본다. 일순간 몇 사람이 동시에 말 그대로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지른다. 표정이 안 좋은 걸 보니 한 골 먹은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이번 연주는 오페라 공연이 아니었던지라 1시간15분 만에 마지막 곡까지 했고, 공연이 끝나자마자 연주자·관객 할 것 없이 미친 듯이 자리를 떴다. 아니, 중간에 나가주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이었다.
이탈리아의 축구 사랑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들 아시리라. 가끔 이렇게 공연과 중요한 축구 경기가 겹칠 때면 극장 내 구석에 삼삼오오 모여 경기를 보는 사람들의 함성이 무대까지 들리는 해프닝이 벌어졌고, 몇 해 전 모차르트의 오페라 <이도메네오>를 공연하는 중 몰래 축구 경기를 보던 음향관리자가 축구 중계를 잘못 연결하는 바람에 무대 위로 중계 소리가 제법 크게 들린 사건도 있었다. 천만다행히도 연주를 막 다 마치고 박수받는 중이었기에 망정이지 그 사람은 큰일 날 뻔했지 싶다.
황급히 의상을 갈아입고 눈썹이 휘날리게 집에 와서 결승전을 본다. 평소라면 공연장 근처에서 극장 동료들과 큰 스크린으로 함께 경기를 봤겠지만, 코로나19 재확산 방지 차원에서 밀라노 시장은 거리에서 스크린으로 축구 경기 보는 것을 금지했다. 영국은 경기 전부터 이긴 분위기였다. 어떤 성질 급한 사람은 영국의 유로컵 우승 문신까지 했다. 경기장도 웸블리겠다, 축구 종가라 자부하는 영국팀은 “이츠 커밍 홈, 풋볼스 커밍 홈”(It’s coming home, Football’s coming home)을 외치며 축구가 집에 돌아온다고 이른 감 있게 샴페인을 터뜨리는 모습이었다.
골키퍼 잔루이지 돈나룸마의 선방, 승부차기 끝에 이탈리아가 53년 만에 유로컵 우승을 했다. 웸블리에 경기를 보러 간 이탈리아의 세르조 마타렐라 대통령의 환희와 흥분이 가득한 모습과 실망이 가득한 영국 왕실 윌리엄 왕자 가족의 모습이 교차한다. 이탈리아 선수 레오나르도 보누치는 카메라를 향해 영국인들이 친 설레발에 빗대어 “이츠 낫 커밍 홈, 이츠 커밍 투 롬”(It’s not coming home, It’s coming to Rome!)이라고 외친다. 눈물 많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탈리아 사람들, 선수·감독 할 것 없이 울고불고 부둥켜안고 난리가 난다. 경기를 감상한 나 또한 이탈리아인이 아님에도, 큰 감동이 밀려왔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으나 발코니로 나가보니 성질 급한 이웃 몇몇은 커다란 이탈리아 국기를 휘두르며 내달릴 준비를 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승리의 기쁨에 흠뻑 젖은 사람들이 자동차 경적을 비롯해 자신이 가진 물건으로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를 내며 거리를 점령했다. 차 한 대에 윗옷을 벗은 남녀 대여섯이 올라타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워보이들처럼 창 대신 국기를 흔들며 도로를 질주한다. 거리는 이런 차로 가득 찼고 인도와 차도의 경계가 없어졌다.
그날 이탈리아는 잠들지 못했다. 밤새도록 울린 경적, 폭죽, 환호에 취했다.
달콤한 승리의 밤이 흐르고 며칠 지나 많이 내려갔던 일일 확진자 수가 슬금슬금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꼭 그날 밤이 원인이라고는 할 순 없겠지만 1천 명 이하로 떨어졌던 수가 열흘 남짓 만에 세 배 이상 늘었다. 유럽에서 여름휴가가 시작되는 시기다. 부디 2020년 가을과 같은 확진자 대폭발이 다시 벌어지지 않기를 온 마음으로 바랄 뿐이다.
박사라 성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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