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나무면 여자는 뭘까. 땅. 꽃. 열매. 바람. 여러 답이 나올 것이다. 열네 살 내 아이 또래는 당연한 어조로 이렇게 답한다. 여자도 나무지.
거목 디제이(DJ) 옆에서 더 오래 굳건히 자리를 지킨 거목 이희호 여사가 영면했다. 내 아이가 교실에서 지금 같은 젠더 교육이나마 받는 것은 이 여사를 비롯한 여성운동 1세대에게 그 뿌리를 대고 있다. 1997년 김대중 대통령 당선 이후 가정폭력방지법과 남녀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지고 30% 여성할당제, 국가인권위원회 설치, 성평등 교육 체계화 등 지금은 당연해 보이는 정책과 제도가 각 분야에 두루 착근됐다. ‘동역자’ 이희호의 힘이 컸다. 두 사람의 이름이 쓰인 문패가 나란히 걸린 자택은 대문 사진만으로도 산교육이었다.
1980년대 후반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우연히 손에 들어온 디제이 옥중편지 모음집을 보다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표현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여고 교훈과 급훈에 ‘정숙’ ‘헌신’ ‘겸양’ ‘인내’ 따위가 버젓이 걸렸던 시절이다. ‘순결’이었던가 ‘순종’이었던가 칠판 위 천장 가까이 붙어 있던 급훈을 우리 반 ‘팔공사’가 ‘순대’로 바꿔 써넣었다. (팔공사는 ‘88올림픽 공식지정사이코’의 줄임말이다. ‘똘기’ 넘치던 친구를 그리 불렀다.) 팔공사는 사실상 백수인 장수생 오빠의 저녁을 차려주러 종종 집에 다녀오기도 했다.
당시 내 눈높이와 정보력으로는 훤칠한 디제이가 왜 교장선생님 같아 보이는 이 여사와 사랑에 빠졌는지 의아했다. 세상 물을 먹으며 조금씩 이해했다. 디제이의 신념과 깨달음은 훨씬 더 견결한 그것을 지닌 이 여사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내에게 버림받을까봐 정치적 소신을 꺾을 수 없었다”는 말은 대단히 낭만적이면서도 진취적인 사랑 고백이었다. 지금 기준으로도 놀라운 커플 롤모델이다.
팔공사가 순수한 급훈을 순대로 바꿀 때 밑에서 의자를 잡아주던 나는 10여 년 뒤 청와대에서 이 여사를 만났다. 당선 1주년을 앞둔 업계 첫 인터뷰였다. 이 여사는 이야기 도중 ‘남주주의’를 비판했다. 정당 행사나 종교 행사, 하다못해 운동권 행사에서도 여성을 보조요원으로 동원하는 일이 많다고. 날 선 주제인데 엄청 다정하게 말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어느 조직에서든 여성주의 좀 하려면 ‘쌈닭’이 되어야 한다는 게 당시 내가 보고 겪은 바였다. 의사결정권은 물론이고 일단 여자들의 절대적 쪽수가 적었다. 인터뷰를 마친 뒤 흥분 상태에서 엉겼다. “회사에서 여사님 만난다고 저를 보낸 것 같다”며 “대통령 인터뷰였다면 남자 선배들이 앞다퉈 했을 것”이라고 이르듯이 말했다. 이 뜬금없는 고자질은 뭐였을까. 지금 생각해도 쪽팔린다. 이 여사가 잠깐 미소를 띠었다. 뭐든 기회를 놓치지 말고 경험과 힘을 키우라고, 때론 제도가 의식을 앞서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위로하듯 얘기한 기억이 난다.
디제이보다 연상이라 짐짓 건강한 척을 할 법도 했건만, 솔직했다. 무릎이 안 좋아 앉았다 일어나거나 가만히 서 있는 게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늘 움직인다고 했다. 운동가, 아내, 가장, 어머니로 일인 다역의 삶을 살아오며 평생 종종걸음쳤으리라 짐작됐다. 고난과 책임을 이고 살아온 그 연배에게서 느껴지는 ‘본래의 것이 아닌 듯 힘 들어간 모습’이 없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본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모습이었다.
디제이는 퇴임 뒤 가장 좋은 점으로 화분에 물 주고 아내와 같이 밥 먹는 걸 꼽았다. 어느 방송에선가 그 말을 하며 벙싯 웃던 모습이 생생하다. 이런 남자에게 끝까지 존경받고 사랑받는 ‘여자’였다. 디제이를 보낸 뒤 10년을 더 채워 “행동하는 양심”으로, 깊고 넓은 마음으로, 한 시대의 소임을 다했다. 성공적인 삶이었다. 지금 어디선가 어린 김대중과 어린 이희호가 자라고 있다면, 대통령은 이희호가 될 것이다. 감사해요. 이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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