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루피외르뒤르는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외진 지역 중 하나다. 검푸른 바다가 초록 이끼 낀 바위를 희미하게 쓸고 지나가면, 대서양청어 떼가 일으키는 검은 그림자가 겨울의 피오르(협만)를 뒤덮는다. 그리고 그 끝에 대서양청어를 따라온 범고래가 있다. 1983년 11월 범고래 한 마리가 이곳에서 잡혔다. 거대한 나비효과는 거기서 시작됐다.
범고래는 두 살 남짓의 수컷으로 엄마 따라 먹이 사냥을 배우고 있었다. 그런데 배 두 척이 끄는 건착망이 새끼 범고래의 몸을 휘감았고, 새끼는 수도 레이캬비크 근처 하프나르피외르뒤르 해양동물원의 작은 물탱크에 도착해서야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해변에 자리잡은 열악한 시설의 동물원은 입장료로 수입을 얻기보다는 범고래를 잡아 팔아 돈을 버는 동물상에 가까웠다. 새끼는 이듬해 캐나다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새로운 집은 대서양과 다른 질감의 바다가 느껴졌다. 태평양 밴쿠버섬 빅토리아의 부두에 세운 수족관 ‘시랜드’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낮에는 서커스, 밤에는 집단괴롭힘</font></font>
범고래는 여기서 ‘틸리쿰’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치누크 원주민 말로 ‘친구’라는 뜻이다. 이미 그곳에는 ‘눗카’와 ‘하이다’라는 나이 든 암컷 터줏대감 둘이 있었다. 둘도 아이슬란드에서 잡혀왔지만 대화가 되지는 않았다. 어릴 때 잡혀온 탓에 소리, 몸짓, 의사소통 등 사회 행동을 어미와 무리에게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매일 밤 주요 공연장 옆의 비좁은 수조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었다. 길이 9m밖에 되지 않는 ‘철제 깡통’은 세 마리가 밤을 보내기에 지나치게 좁았다. 눗카와 하이다는 스트레스를 신참에게 풀었다. 얼마 안 돼 틸리쿰의 몸은 이빨로 긁히고 물어뜯긴 자국으로 가득했다. 낮에는 점프해서 공에 입을 맞추고, 밤에는 철제 깡통에 들어가야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틸리쿰은 항상 배고팠다. 그렇게 7년이 흘렀다. 그리고 1991년 2월 오후, 사람 한 명이 풀장으로 미끄러졌다. 틸리쿰은 그의 발을 확 물었다.
몸길이 7~8m에 이르는 거대한 범고래를 쇼에 맞게 길들인 것은 돌고래쇼가 시작되고 반세기가 지난 뒤였다. 초창기 범고래쇼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고래는 1965년 미국-캐나다의 연안 바다에서 잡힌 ‘나무’였다. 전설적인 범고래 사냥꾼이자 범고래 전시 산업의 ‘개척자’인 테드 그리핀이 8천달러에 산 나무는 미국 시애틀 아쿠아리움에서 전시되며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돈이 된다’는 걸 직감한 그리핀은 대대적인 범고래 사냥을 개시했다. 1965년 10월31일 암컷 한 마리를 잡았으니, 그의 이름이 ‘샤무’다. 캘리포니아의 신생 테마파크 ‘시월드’는 이 범고래를 사들여 캐릭터화하면서 세계 최대 해양 테마파크로 성장한다. 시월드 범고래에게는 공식적으로 개개의 이름이 없다. 그들은 모두 ‘샤무’다. 얼룩무늬 점박이 범고래는 디즈니 캐릭터에 버금갈 정도로 미국 어린이들에게 인기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여러 차례 공격 이후에야 직시한 실체</font></font>
환경단체의 감시와 비판적인 여론으로 1972년 미국 정부가 자국 영해에서 고래 포획을 금지하는 해양포유류보호법(MMPA)을 제정하자, 시월드 등 수족관들은 아이슬란드 바다를 개척한다. 1976~88년 아이슬란드에서 48마리를 포획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이슬란드에서도 야생 포획이 어려워지자, 시월드는 인공번식 기술 개발에 뛰어든다. 건강한 정자를 얻기 위해 시월드는 캐나다 시랜드에서 틸리쿰을 샀다. 시월드에서 틸리쿰은 공연에서 환호받는 ‘샤무 스타’가 아니라 번식 프로그램의 ‘정자은행’이었다. 무려 21마리 범고래의 아버지였다. 틸리쿰이 뿌린 씨로 말미암아 시월드는 반세기 만에 미국 샌디에이고·올랜도·샌안토니오와 아랍에미리트연방 아부다비에 공원을 가진 세계 최대 해양 테마파크로 컸다.
두 번째 사건이 터졌다. 1999년 7월6일 미국 시월드 올랜도에서 한 남성이 폐장된 뒤에도 몰래 수족관에 남았고, 이튿날 아침 그는 물에 뜬 주검으로 발견됐다. 틸리쿰은 주검 주변을 맴돌았고, 주검에는 물어뜯긴 자국이 가득했다. 2010년 2월24일 세 번째 죽음이 발생했다. 시월드 올랜도의 선임 조련사 돈 브랜쇼의 발을 낚아챈 틸리쿰은 그를 인형처럼 물고 풀장을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그제야 틸리쿰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살인 고래’는 무엇인가? 왜 그랬는가? 우리는 고래를 가두어도 되는가?
이후 틸리쿰은 일련의 사건을 촉발했다. 2013년 제작된 다큐멘터리 가 방아쇠가 됐다. 범고래를 포함한 돌고래의 수족관 전시 공연을 반대하는 운동이 거세졌고, 대표 주자 시월드의 관람객이 급감하고 주가가 하락했다. 결국 시월드는 항복했다. 조엘 맨비 시월드 최고경영자(CEO)는 2016년 3월 기고에서 “우리 테마파크에서 범고래를 본 사람들이 점점 더 범고래가 사람 손에 길러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면서 범고래 번식 중단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2013년에는 인도, 2015년엔 캐나다, 2017년 프랑스와 멕시코시티가 고래류의 전시 공연을 법적으로 금지하거나 비슷한 조처를 했다.
범고래 한 마리가 세상을 바꾸었다고 하면 허황된 이야기일까. 여기서 우리의 선입견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
첫째, 동물을 수동적인 물체들의 집합체로 생각하는 경향이다. 성격을 가진 개개의 동물은 없고, 종의 일반적인 특성을 전부로 생각한다. 누군가 당신을 ‘두 발로 걷는 이 동물은 보통 가족·친구와 어울리는데, 가끔 혼자 있는 시간도 즐긴다’고 표현하면 그것으로 충분할까. 범고래도 마찬가지다. 틸리쿰이 일으킨 세 번의 ‘사고’는 틸리쿰의 유전자와 환경이 맞물려 만들어낸 틸리쿰 성향의 결과물이다. 둘째,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다. 인간이 동물을 지배한다고 생각하지만, 면밀히 들여다보면 둘의 관계는 상호적이다. 인간에 의해 동물원에 갇혀 사는 동물일지라도, 그들의 몸짓과 눈빛은 사람들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틸리쿰의 일탈 혹은 저항도 사람들에게 거울을 들여다보게 했고 일련의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비좁은 수족관이 싫어서, 엄마가 그리워서</font></font>
이쯤에서 이렇게 빈정대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틸리쿰에게 저항할 의도가 있었느냐고요? 그렇다면 고려시대 반란을 일으킨 노비 만적은 ‘근대 민주주의’를 알아서 봉기한 건가? 아니다. 틸리쿰은 비좁은 수족관이 참을 수 없어서 반란했다. 갑갑한 일상이 죽을 만큼 싫어서 반란했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엄마가 생각나서 반란했다. 그리고 그것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사람의 변화, 사회의 변화로 이어졌다.
런던(영국)=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font color="#008ABD">이 기존 구독제를 넘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은 1994년 창간 이래 25년 동안 성역 없는 이슈 파이팅, 독보적인 심층 보도로 퀄리티 저널리즘의 역사를 쌓아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진실에 영합하는 언론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투명하면서 정의롭고 독립적인 수익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의 가치를 아는 여러분의 조건 없는 직접 후원입니다.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는 방법, 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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