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안에 난독증에 깜빡깜빡까지… 뭘 읽기 너무 힘들다. 이런 요지로 주절댔더니 아이가 개그맨 조진세 말투로 한마디 한다. “엄마, 그거 다 핑계야.” 그러곤 덧붙인다. “그냥 당당히 읽지 마.”
나이에 관해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자신에게는 면죄부가 되고 타인에게는 차별이 된다. 내가 이러는 건 나이 때문이니 양해해달라 하고, 당신이 그러는 건 나이 탓이니 주책이나 되바라짐이라 치부한다. 고무줄 잣대다. 노인을 공경하자면서 배제하고 아이들이 희망이라면서 ‘어린노무자슥’이라 무시한다. 서른 줄에만 들어도 ‘이 나이에~’를 내세워 자신의 습관이나 행동을 변명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나이를 의식하지만 제대로 된 나잇값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나 모른 척한다.
한 친구가 말끝마다 허무하다, 갱년기인가봐, 사는 게 결국 이런가, 우는소리를 한다. 나보다 몇 살 많긴 하지만 같이 나이 먹는 처지에 왜 유독 징징대나 싶으면서도 마음이 쓰여 위로하면, 그건 그렇고 내 친정은, 내 동서는, 옆집 사람은, 계속 다른 대상으로 넘어간다. 주변 사람 모두를 ‘모두까기’ 해댄다. 일종의 우울증인가 살짝 걱정했는데, 친구를 더 오래 알아온 이가 귀띔했다. “걔 원래 그랬어. 30대에는 육아 스트레스, 40대에는 경력 단절, 50대 넘어온 지금은 갱년기 타령이야. 그냥 둬.” 원래도 관심받으려는 성격인데 요즘은 갱년기를 들먹이며 더 그럴듯하게 우는소리를 한다는 요지였다. 하긴 나와 교류한 10여 년간 그는 늘 힘든 일이나 원망의 대상이 있었다. 요새는 늦게 본 자식이 사춘기라 힘들다고 난리다. 그 집의 사춘기-갱년기 전쟁은 결국 ‘갱년기 승’으로 끝날 거 같다. 친구의 60대, 70대 레퍼토리가 궁금하다.
팔순인 내 엄마는 아직도 ‘사교계 여왕’으로 군림하고 싶어 한다. 친구분들 상당수는 병치레를 하거나 병수발을 드는 처지라 활동이 예전 같지 않다. 매번 서운한 일이 생긴다. 그런 날이면 유난히 시무룩해한다. 상황을 입맛대로 재편하여 우기는 면도 있다. 언니들은 엄마가 늙어서 감정적으로 더 감당을 못하고 두서가 없어졌다고 연민하는데(그러면서 때론 흉보는데), 나는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 기억 속 엄마는 젊은 시절에도 그랬다. 포기를 잘 모르고 자기 위주인데다 뜨거운 성격이라 형제자매와도 이런저런 갈등이 따랐다. 그런 엄마를 ‘늙은 할매’ 테두리 안에 넣고, 늙어서 그렇다고 퉁치는 건 옳지 않다. 내 엄마는 늙어서 외로운 게 아니다. 나이 먹고도 계속 여왕 노릇 하려 드니까 기력 달리는 친구들이 못 받아주는 것이다. 엄마에게 그렇게 충고했다가 쌍욕 먹었다. 나이 얘기는 뺄걸 그랬나.
물론 우울증이나 치매 등에 따른 증상이라면 다른 문제다. 다르게 이해하고 도와야 한다. 그런 경우는 반드시 어떤 시그널이 있다. 친구나 엄마는 그쪽은 아닌 것 같다. 친구의 푸념과 한탄은 들어보면 ‘시샘’과 ‘자랑질’의 다른 면이다. 보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친구는 자기를 둘러싼 조건으로 자신을 설명하려 든다. 성에 안 차면 쉽게 남 탓을 한다. 그도 안 되니 나이 탓까지 한다. 그러느라 정작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놓친다. 엄마는 당신 나이를 자꾸 잊는다. 굼떠지고 체력이 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인데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감추거나 부정한다. 그러다가 판단이 더 흐려진다. 급기야 더 늙기 전에 사흘간 비행기 이코노미석을 갈아타며 이구아수폭포를 보러 가시겠다는데, 이미 충분히 늙었으니 모쪼록 다음 생에 보셨으면 좋겠다.
나이는 몸무게나 근력과도 같은 게 아닐까. 지나치게 의식해서도 안 되지만 제대로 관리하지 않다가는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잃는다. 타고난 마음보가 작아도 성격이 모나도 크고 작은 나이 근육을 키우면 얼마든지 단단하고 유연해질 수 있다. 그래야 나잇값을 한다.
나이 뒤에 숨지 말자. 그거 다 핑계다.
김소희 칼럼니스트이 기존 구독제를 넘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은 1994년 창간 이래 25년 동안 성역 없는 이슈 파이팅, 독보적인 심층 보도로 퀄리티 저널리즘의 역사를 쌓아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진실에 영합하는 언론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투명하면서 정의롭고 독립적인 수익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의 가치를 아는 여러분의 조건 없는 직접 후원입니다.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는 방법, 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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