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초등학교의 학예발표회장. 류우종 기자
우연히 아이 앞에서 아이 아빠와 내가 마치 배틀 하듯 “우리가 급류에 휘말렸다면 네가 아무리 수영을 잘한다 해도 뛰어들 게 아니다” “큰불에 집이 무너지고 있다면 절대 구하려 들어선 안 된다” 등 ‘만약의’ 위기 상황을 상정하고 “불가능한 일에 목숨 걸지 마라” “뒤도 돌아보지 마라” 유의 말을 번갈아 늘어놓았다. 상상할 수 있는 나쁜 상황은 끝이 없었다. 울컥하기도 했다. 사뭇 비장하게 이어지던 이야기를 아이가 한마디로 정리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
순간, 까악까악 귓가에 울리는 까마귀 소리. 그러니까. 그러게나. 제가 알아서 하겠지.
부모의 덕목 중 하나는 아이와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일이다. 아이가 자라면서 그 거리를 조절하는 게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답은 없다. 성격도 처지도 다르기 때문이다. 아이도 나도 편안한 상태가 대략 맞는 거리 아닐까. 중요한 것은 ‘나’를 기준점으로 잡아야 방향도 거리도 제대로 가늠된다는 사실이다. 나이 든 부모와 맺는 관계도 마찬가지다.
다 큰 자식 집에 들러 냉장고까지 뒤엎는 어머니가 있다. 도와줄 일 없나 찾다보니 그랬다, 밥이나 제대로 챙겨 먹는지 안쓰러워 그랬다는 게 당황한 자식 앞에서 주로 하는 말씀이다. 영 걱정되면 반찬이나 택배로 부쳐주는 게 좋다. 제아무리 호의라도 받는 사람의 처지를 헤아리지 않으면 간섭이고 개입이다. 시대가 바뀌었다지만 아직도 많은 어머니가 그리하고 산다. 많은 자식이 이를 못 말리고 끙끙댄다. 그러다 엉뚱한 데서 터지기도 한다.
부모와 자식 간 생활방식과 살림살이를 둘러싼 갈등은 자식 쪽에서 먼저 정신 차리고 해결해야 한다고 본다. 저마다 짊어진 관습과 경험의 무게가 다른데, 나이 많은 쪽이 아무래도 더 무겁기 마련이라서다. 관습은 억압으로 작용하기 쉽고 경험은 고집으로 둔갑하기 일쑤다. 이럴 때 육아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그랬구나 어법’과 말하는 이의 감정을 먼저 알리는 ‘나 어법’이 꼭 필요한 것 같다. “어머니께서 양파가 썩어가는 것을 보고 마음이 쓰이셨군요. 그래서 허락도 없이 제 살림을 뒤지셨군요.” “저는 아버지가 그리 말씀하시면 속이 상합니다. 그래서 전화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고 내 마음도 드러낸다. 부드럽게. 공감의 기본이다. 부모라고 예외일 수 없다. 괜히 돌아서서 ‘시월드’니 ‘장모패권’이니 원망하거나, 배우자나 파트너에게 시비 거는 것보다 낫다. 할 말 제대로 못하는 건 멀쩡한 부모를 정신줄 놓은 뒷방 늙은이 취급하는 꼴이 아닐까. 그게 오히려 불효이다.
고르게 ‘사랑해주지’ 않으셔도 된다고 온몸으로 티를 내어도 막무가내로 ‘기계적인 형평성’을 강조하는 부모도 있다. 둘째네 손녀 재롱잔치에 갔으니 큰애네 손자 발표회에도 내가 꼭 가야 한다는 식이다. 일종의 ‘헌신 시위’이다. 이분들은 가족의 안녕과 화목도 ‘집회’로 증명하려 한다. 날짜를 정해 통고하고 의무 참석을 당연하게 여긴다. 주최 쪽은 보통 부모이거나 대리인인 자식 중 하나일 때가 많다. 저마다의 고유성, 개별성은 사라지고 모름지기 가족 구성원이라는 ‘역할’만 도드라진다. 가족이 꼭 ‘덩어리’로 만나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나. 그 순간 그 상황을 즐길 이들끼리 만나는 게 좋지 않을까. 때론 옆집 사람이 낄 수도 있고 먼 친척이나 동네 애가 오는 것도 좋겠다.
내 마음이 그렇듯 어쩌면 나이 든 부모 마음에도 겁먹은 어린아이가 있는지 모른다. 어떤 상처나 불안이 작용한 것일 수도 있다. 그도 아니라면 그저 다른 방법을 몰라서 그러는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시간에 기대어 서로에게 다정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단호하게 선을 그어주는 게 좋다. 그게 서로를 존중하는 길이다. 어린 자식도 물론이지만 나이 든 부모도 독립된 인격으로 대해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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