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한국 음악계는 ‘안익태 친일 논란’으로 발칵 뒤집혔다. 1941년 9월18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음악회’에서 안익태는 직접 작곡한 친일 음악 을 지휘했는데, 일부가 애국가의 모태가 된 (코리아 판타지)의 선율과 겹친다는 지적이 나온 것이다.
당시 ‘에키타이 안’으로 불린 안익태는 에하라 고이치라는 일본 외교관 집에서 머물렀다는 사실도 공개됐다. ‘안익태 애국가’를 사실상 ‘국가’(國歌)로 부르는 현실을 방치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 힘을 받았다. 하지만 ‘관행의 관성’ 탓인지 안익태 애국가는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100돌을 맞은 올해도 곳곳에서 불린다.
(삼인 펴냄)를 펴낸 이해영 교수(한신대 국제관계학부)는 1940년대 안익태의 베를린 생활을 파헤치며 ‘에키타이 안’의 친일 행적뿐 아니라 친나치 행적도 해부한다. 안익태는 1941년 말~1944년 4월 초까지 2년 반 남짓 주베를린 만주국 공사관 참사관이었던 에하라의 집에서 기숙했다.
2015년 독일의 한국학자 프랑크 호프만이 미국 중앙정보국(CIA) 문건으로 밝혀낸 사실을 보면, 에하라는 외교관을 위장한 일본 정보기관의 독일 총책이었다. 에하라는 독일인·조선인 등 학자와 예술가들을 망라하는 300여 명의 다양한 정보원을 뒀는데, 안익태 또한 이들 중 한 명이었다.
1936년 애국가를 발표할 때만 해도 “애국가를 부르실 때는 애국가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서 애국적 정신으로 활기 있게 장엄하게 부르시되 결코 속히 부르지 마십시오”라고 당부했던 안익태는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독일을 비롯해 추축국(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독일·이탈리아가 맺은 삼국동맹을 지지한 여러 나라)·점령국·우호국인 헝가리·루마니아·스페인 등을 돌며 30여 차례 지휘봉을 잡았다. 겉으로는 ‘민간 교류단체’지만 실제론 나치의 재정적 지원을 받는 독-일협회가 기획·개최한 공연 무대에 여러 차례 등장했다.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프랑코(군사독재자) 치하의 스페인으로 ‘도주’한 안익태는 1955년 ‘이승만 탄신 80주년 경축 공연’을 위해 25년 만에 귀국하기도 했다. 일본과 나치에 끈을 댔던 것처럼, 해방 이후엔 이승만에 의지해 자신을 미국 워싱턴 대사관 문화참사관으로 임명해달라거나 카네기홀 자선 공연을 열게 해달라는 등 자잘한 민원을 넣었다.
이해영 교수는 ‘안익태 애국가’를 지금처럼 방치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본질적으로 그리고 정의상 모든 애국가는 하나의 양보할 수 없는 최소 조건을 요구한다. 일반 대중의 눈높이에서 그것은 멜로디나 가사의 우월성이나 높은 미학적 수준에 있다기보다, 만든 이가 최소한 ‘애국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시민사회와 협력해 ‘국가(國歌)제정위원회’를 만들고 가사와 곡을 시민에게 묻는 공론화 방식을 도입하자고 제안한다. 공론화는 애국가 교체 문제가 나올 때마다 가장 많은 사람이 지지했던 것으로, 지은이는 “가장 솔직하고 또 역사 정의에 가장 부합되는 방안”이라고 강조한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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