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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부모는 짜장으로 기억된다

오감으로 기억하리, 늙은 부모의 이삿날
등록 2018-11-06 20:09 수정 2020-05-03 04:29
한겨레 자료

한겨레 자료

해가 바뀌면서 팔순인 어머니와 이미 80대 중반인 아버지가 내 집 근처로 이사 왔다. 두 분이 함께 사는 마지막 집일 듯해 내내 마음이 쓰였다. 전에는 부모님 집이 차로 한 시간 거리였지만 이제는 걸어서 10분도 안 걸린다. 이 소식을 들은 지인들, 심지어 내 오빠와 언니들조차 “괜찮겠냐” 염려부터 했다. 내가 그렇게 이상하게 살아왔나, 잠깐 반성했지만, 지인들은 노인에 대한 일반론을 편 것이고 오빠와 언니들은 나와 내 부모의 성정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나 못지않게 별나고 이상한 쪽은 내 부모다. 노인이 가질 법한 모든 성정의 극단을 지니고 있다고나 할까. 짐작은 했지만, 정도 이상 분별없고 의심 많고 우겨댔다.

가령 케이블티브이 설치 기사가 고장 난 전축도 봐줄 수 있다고 믿고, 새로 들인 김치냉장고 배송 기사가 에어컨 할인 정보도 알고 있다고 여기는 식이다. 분업화되고 시간에 쫓기는 노동의 현실을 잘 몰라서인데, 상대의 답이 시원찮은 건 노인인 당신들을 무시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흥분하기와 침울하기 사이를 롤러코스터처럼 오간다. 그 와중에 둘이서 꾸준히 다툰다. 전화기를 어디에 놓을지를 두고도 의견이 갈린다. 조용히 갈리는 게 아니라 버럭버럭 한 치 물러섬도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렇게 다퉈놓고는 돌아서면 금방 까먹는다.

남다른 책임감의 소유자인 큰언니와 큰형부는 이삿날 내내 이 꼴을 보면서 얼이 빠지는 기색이던데, 어릴 때부터 내놓은 자식이었던 나는 웃겨서 죽는 줄 알았다. 내 부모도 내 옆에 와서 살 줄은 몰랐다고 계속 말했다. 욕인지 칭찬인지.

공기 좋고 경치 좋은, 마당 딸린 집은 결코 노인이 살 곳이 못 된다. 일정 나이가 되면 지하철 닿는 곳에, 병원에서 멀지 않게, 가급적 자식 가까이 사는 게 21세기 노인으로 잘 살기 위한 세 가지 중요한 환경이라는 게 아버지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을 편 지 어느덧 십수 년, 아무 자식도 호응을 안 해주었다. 두 분은 자식을 믿지 못해 제 몸을 각별히 챙겼고 노후 대책도 나름 알뜰히 해왔다.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삿짐 옮기는 분들이 꽤 고생했다. 무릎을 절룩대면서 어머니는 다듬잇돌까지 당신이 질질 끌겠다고 나서고, 아버지는 이 사람 붙잡고 말 걸고 저 사람 붙잡고 말 시켰다. 모두 떠난 저녁, 한숨 돌리고 중국 음식을 배달시켜 먹었다. 아버지는 입가에 짜장 소스를 묻힌 채 탕수육을 푹 찍어 들며 함박웃음을 짓고, 먼저 식사를 마친 어머니는 그 너머 거실에서 텔레비전 드라마에 푹 빠져 박수까지 치며 깔깔 웃는다. 빤짝 빛났다. “아빠, 맛있어?” “응.” “엄마, 재밌어?” “응.”

졸지에 아이 둘이 더 생긴 기분이었다. 아이들은 싸우면서 크지만 노인들은 싸우면서 늙는다. 아이는 점점 여물어지지만 노인은 점점 풀어지고 흐트러진다. 앞으로 어떤 일이 어떻게 펼쳐질지 겪어봐야 알겠으나 채 정리 안 된 짐 더미 옆에서, 짜장면에 웃고 드라마에 웃는 늙은 부모의 순진하고 무구한 표정은 참 좋았다. 보석 같았다. 훗날 이별한 뒤에도 때때로 떠오를 것 같다.

부모는 오감으로 기억된다. 어느 해 질 녘 집 근처 공터에서 젊은 아빠가 불어주던 휘파람 같은 거, 부엌을 기웃대는 내 입에 쏙 넣어주던 젊은 엄마의 갓 볶은 우엉조림 같은 거 말이다. 그 순간 뺨을 스치던 바람의 밀도, 석양의 빛깔, 강아지풀의 촉감, 부엌 가득 피어오르던 냄새, 멀리서 들려오던 두부 장수의 방울 소리까지 생생하다. 나는 내 자식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자식은 오감에 하나 더, 육감으로 키운다. 부모 이삿날 내 아이는 어른들이 정신없는 틈을 타 짐작대로 내리 게임을 했다. 약속한 시간만 했다지만 글쎄. 데스크톱컴퓨터가 심하게 열을 받아 뜨끈뜨끈했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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