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아이들에게는 거의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흡수한 것 같은 특별한 악들이 있는데, 그것은 극장에서의 편파성, 전차 경주와 검투사 경기에 대한 열정이다.”(배은숙 지음, 에서 재인용)
고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했다는 이 말은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진 검투사 경기가 인간의 잔인한 본능을 자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황제나 귀족이 여는 검투사 경기는 ‘승리 아니면 죽음’이라는 막다른 길에 생명을 처박아놓고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열광시키는 공연이었다.
콜로세움의 조연들영화 나 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박진감 넘치는 승부만 원형경기장에서 있던 게 아니었다. 검투사 대결이나 전차 경주가 하이라이트인 건 분명했지만, 또 다른 중요한 조연이 있었으니 바로 로마 식민지에서 잡아온 동물이었다.
동물은 오전 ‘식전 행사’에 출연했다. 사슴·토끼·멧돼지 등 로마인에게 익숙한 동물도 있었지만, 코끼리·사자·표범·곰·호랑이 등 이국적인 동물이 인기 있었다. 지중해 건너 북아프리카와 중부 유럽, 서아시아에서 잡아온 동물이었다.
동물을 이용한 공연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베스티아리우스라는 ‘동물 검투사’가 동물에 맞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움을 벌이는 베나티오 경기가 있었다. 베스티아리우스는 직업 사냥꾼도 있었지만, 대개 경기장에서 시한부 삶을 사는 노예나 범죄자였다. 사자 대 표범 등 동물끼리 싸움도 붙였다. 낮 12시는 동물에게 상대적으로 편한 식사 시간이었다. 죄수를 묶어놓고 동물에게 밥으로 던지는 처형식(담나티오)은 잔혹한 스펙터클이었다.
이탈리아 수도 로마에 있는 콜로세움은 아직도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서 동물은 전날부터 굶주린 채 지하 우리에 갇혀 있다가 시간이 되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원형경기장으로 배출됐다. 5만 관중의 함성으로 야수는 곧잘 흥분했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살육전이 시작됐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패배한 자는 죽었다.
동물은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대규모로 동원됐다. 참혹한 ‘살육 공연’이 얼마나 방대하게 이뤄졌냐 하면, 기원전 2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마르스 신전을 봉헌할 때 사자 260마리가 살육됐고, 로마에서 콜로세움이 개장할 때는 100일 동안 동물 9천 마리가 죽음의 쇼에 동원됐다.
로마의 황제와 귀족들은 더 많이, 더 희귀한 동물을 보여줌으로써 세를 과시했다. 이국적인 동물은 식민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정치력의 지표였다. 북유럽의 스라소니, 인도의 코뿔소, 아프리카의 하마와 악어도 있었다. 불완전한 역사 기록이지만, 북극곰도 원형경기장에 섰을 거라고 추정한다.
로마제국의 잔혹한 시민권원형경기장은 황제와 귀족, 평민까지 들어올 수 있는 일종의 ‘평등 공간’이었다. 그러나 로마 시민에게만 평등했을 뿐이다. 관중석 밑 경기장에서 육박전을 치르다 죽는 이는 대부분 제국에 저항하던 적국의 군인들이었고, 동물 또한 로마가 확장한 식민지의 야생에서 평화롭게 살다가 잡혀온 생명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잔혹한 사냥 경기에서 공범 내지는 공조자였다.
정오에 열리는 처형식에서도 로마 시민은 고통 없이 단칼에 처형된 반면, 비시민은 야생동물에 물어뜯기거나 십자가형으로 천천히 죽어갔다. 생명의 위계에서 동물은 최하위에 있었다. 살아남은 동물은 지하 우리로 돌아갔지만 고통이 연장된 것일 뿐, 죽을 때까지 경기에 나가야 했다.
로마 시민은 왜 그렇게 잔혹했을까? 지금의 도덕 잣대로는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지만, 내면의 잔혹성을 끄집어내 합리화해줄 제도만 있다면 인간은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모순적인 존재다. 로마 시대 동물을 연구한 조지 제니슨은 1932년 쓴 에서 베나티오와 담나티오가 제국의 정부와 부의 계급에 복속한 대가로 시민에게 주는 위락의 시간이었다고 지적한다. 귀족에서 평민까지 잔혹함을 공유함으로써 그들은 제국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인간종의 일원으로서 같은 편임을 확인했던 것이다.
물론 인간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 잔혹하게 죽어가는 동물은 때로 로마 시민의 죄의식을 자극했다. 기원전 55년 로마의 집정관 폼페이우스가 코끼리 20마리를 동원해 인간과 싸움을 붙였을 때, 코끼리들은 멋지고 절박하게 싸워 열광을 불렀다. 그러나 결국 코끼리들은 심각한 상처를 입어 무릎으로 기면서 신음을 냈고, 오히려 관중은 폼페이우스를 저주하며 코끼리의 편을 들었다고 한다.()
“원형경기장의 승리에 시골이 경탄하고, 야수들이 사는 숲도 그것을 목도하네. …기름진 땅은 잃을 게 없고 곡식은 풍성하게 자라지만, 다가올 운명을 아는 야수들은 공포에 떨고 있네.”(로마의 시인 룩소리우스의 풍자시 중에서)
비살상 동물쇼가 나온 이유수도 로마와 식민지 주요 도시에서 벌어진 동물 사냥 경기는 생태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로마제국은 ‘생태 제국주의적’ 모습도 취했다. 북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로마는 옥수수 등 곡물을 들여왔고, 식민지의 숲은 점차 밭으로 개간됐다. 서식지를 잃은 야생동물은 사냥꾼들에게 쫓기며 원형경기장으로 끌려가야 했다. 북아프리카 식민지에만 동물 사냥 경기장이 70곳 있었다. 로마사가인 데이비드 봄가드너는 2세기를 즈음해서 사자 등 인기 동물들이 북아프리카에서 줄어들기 시작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4세기 한 로마 귀족의 편지를 보면, 로마 도심의 원형경기장에 야생동물을 공수하기 힘들다는 내용이 나온다.
야생동물 공수가 어려워졌으므로, 야생동물을 사육하기 시작한다. 원형경기장에 내보낸 뒤 죽이지 않고 재사용한다. ‘비살상적인’ 동물쇼가 나온 것도 이즈음이다. 비싼 동물을 살려두어야 했기에 묘기를 가르쳐 보여주기 시작한다. 봄가드너는 근대 유럽 동물쇼의 기원이 로마에 있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억해둘 동물이 있다. 원형경기장의 무참한 살육전에 단골로 출연해 죽어나간 북아프리카 코끼리다. 사하라사막 이북에 살던 작은 체구의 이 코끼리는 로마제국 때 멸종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과 함께 알프스산맥을 넘은 그 코끼리다. 동물쇼와 관련해 멸종한 최초의 동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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