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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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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갬의 끝판왕’을 뭉개라

회피하고 도망치며 나 몰라라 멀쩡히 사는 이들에 대처하는 자세
등록 2018-08-21 18:43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휴대전화가 울리는데 ㄱ은 발신자를 보고는 받지 않았다. 장인이란다. 말을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어르신들이 있으니… 바쁜 시간이라 그런가 했는데 거절 문자조차 보내지 않고 계속 울리게 두는 건 의아했다. 며칠 뒤 대화 중에 휴대전화가 또 들들댔다. 이번에는 어머니란다. 짐작되는 용건이라며 역시 받지 않았다. 받았다가 금방 끊으면 어머니가 오히려 섭섭해할 수 있다고 했다. 유별난 양가 부모님을 둔 줄 알았다. 겪어보니 유별난 건 그였다.

엄청난 ‘뭉개리우스’다. 일단 뭐든 피하고 미루고 본다. 그러면서 누구한테도 ‘노’라고 못한다. 이런저런 업무도, 만나자는 약속도 거절 못한다. 그러느라 늘 허둥대면서도 뭉갠다. 그렇다고 게으르거나 무능한 건 아니다. 꽂힌 일이나 좋아하는 일은 잘 해치우는 편이다. 긴장이 따르거나 하기 싫은 일, 혹은 그런 사람과 얽힐 때 유독 그런다. 이런 상사나 동료는 최악은 아니라도 상당히 나쁘다. 이런 남편이라면? 글쎄, 같이 안 살 거 같은데.

ㄴ의 엄마는 ㄴ에게 자주 전화한다. 쇼핑 가자, 누구 만나는데 같이 가자, 네 집 앞인데 들르겠다…. 단짝 친구나 자매 사이 같지만, ㄴ은 엄마를 버거워한다. 연락이 오면 핑계부터 찾는다. 엄마는 그런 딸을 손에 쥐지 못해 안달한다. 허락 없이 냉장고 바꾸었다고 엄마가 화나서 몇 달 동안 말을 섞지 않은 적도 있단다. 그렇다고 ㄴ이 엄마에게 성숙한 태도를 보인 적도 없다. 들볶이거나 버럭 한소리 듣지 않고서는 엄마와 관련된 것을 먼저 생각하거나 처신하지 않는 게 습관이 되었다. 여동생들은 그런 그에게 ‘뭉개리아나’라는 별명을 붙였다.

하는 일도 사는 곳도 다르지만 둘은 공통점이 있다. 어릴 때부터 어떤 이유로든 주목받던 아이였다. 누나 셋 여동생 하나 둔 ㄱ은 그 시절 귀한 외아들로 ‘궁디 팡팡’ 받았고, 세 자매 중 맏딸인 ㄴ은 상대적으로 ‘똑실한’ 동생들 탓인지 머리 쥐어박히기 일쑤였다. 둘은 누구에게든 밉보일까 혼날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자주 내비쳤다. 완벽한 아들과 천덕꾸러기 딸. 혹은 ‘그 부모의 아들, 딸’. 거기서 한 치도 벗어나거나 성장하지 못하고 갇혀 있다고 할까.

ㄱ은 양가 부모에게 휴가도 비밀로 하는 눈치다. 혹시나 어른들이 앞뒤 안 재고 ‘들이댈’까봐 그런다는데. 소신껏 행동하지 못하면서 끝까지 좋은 사위, 좋은 아들이고는 싶은 모양이다. 그런 그도 하나뿐인 제 아들에게는 어찌나 살뜰한지, 고등학생 책가방까지 싸준다. 휴대전화는 매번 최신형으로 바꿔준다. 과보호에 과투자다. ㄴ은 노인이 되어서도 더 노인인 엄마에게 질질 끌려다닐 것 같다고 걱정하는데, 다 큰 제 딸에게 끌려다니는 걸 더 걱정해야 할 듯하다. 거절 못하고 어린애 같은 엄마의 성정을 귀신같이 활용하는 게 그 집 멋쟁이 백수 딸내미다. 나잇값 못하고 살아온 태도가 자녀에게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치는 셈이다. 정작 본인들은 별로 안 힘들다. 회피하고 도망치며 나 몰라라 멀쩡히 산다. 대신 주변 사람들이 힘들다. 그 뒷감당을 누군가는 하지 않겠는가. 이게 뭐지, 이게 뭐지 하면서도 치다꺼리를 해주는 게 늙은 부모이거나, 부모처럼 보모처럼 눈 밝고 책임감 많은 배우자나 형제자매, 이웃일 수도 있다. 받기만 하는 그들은, 그래도 되니까 그래도 되는 줄 알고 그래온 거다. 이런 수발 유발자들 같으니라고.

어떤 사이에서도 이런 불균형은 좋지 않다. 건강하지 않다. 자꾸 손이 가는 가족이나 친구, 동료가 있는데 챙겨줘도 챙겨줘도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기분이라면, 혹시 ㄱ이나 ㄴ 같은 ‘뭉갬의 끝판왕’이나 외면하기는 어려운 사이라면, 정성껏 대하지 말고 대충 대하길 권한다. 그들이 자신을 대하듯이 말이다. 스스로 삶을 대하는 자세를 넘어서까지 주변에서 대해줄 필요도, 방법도 없다. 나만 미치고 팔짝 뛴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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