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사회에는 냉기류가 흘렀다. 정순만이 석방됐을 때 그랬다. 양성춘 살인사건(제1219호 ‘개척리 살인사건’ 참조)의 피고인인 그는 불과 1년 만에 모든 죄과를 씻고 보란 듯이 밝은 세상에 나왔다. 그의 출옥을 보고서 두 개의 상반된 여론이 조성됐다. 잘됐다고 반기는 사람들과, 과실 사고이므로 그만하면 충분히 죗값을 치렀다고 보는 사람들이었다. 분개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무고한 사람을 죽였는데도 가벼운 형벌을 받은 것은 재판이 불공정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었다. 두 여론은 팽팽히 맞섰다. 차갑고 긴장된 분위기가 한인 거류지에 감돌았다.
당시 분위기를 전하는 현지 인사의 말을 들어보자. 개척리에 오래 산 여성이었다. 사료에 ‘박산석의 모친’으로 기록된 이 여성은 여성단체 자혜부인회 회장이자, 한인 기독교회 확장을 위해 그때 화폐로 ‘5루블’을 기부할 만큼 재력이 있었다.
순식간에 꺼진 ‘애국 동포의 희망’“상년 겨울에 본항 한인 남자 사회에서 한 풍진이 일어 각각 한 모퉁이를 웅거하고 일장 승부를 결함에, …대동공보가 폐간되므로, 애국 동포의 희망이 거의 단절하고 외양 사회의 기관이 거의 파괴되니, 어찌 통곡유체할 일이 아니리오.”( 1910년 5월15일)
지난겨울 한 풍진이 일었다는 표현은 1910년 1월 발발한 양성춘 살인사건을 가리켰다. 그 때문에 ‘한인 남자 사회’가 둘로 나눠 각각 한 모퉁이를 웅거하고 한바탕 승부를 겨뤘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사회의 분열이 심각했고, 국권 회복의 희망이 물거품이 됐음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부정적 영향이 너무나 심각해 눈물 흘리며 통곡하는 것 외에 달리 어찌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애국 동포의 희망’이 꺼진 데는 또 다른 원인도 작용했다. 양성춘 살인사건 뒤 불운한 두 사건이 덮쳤던 것이다. 그중 하나는 조국의 운명이었다. 1910년 8월29일 이른바 ‘일한병합’ 조약이 체결돼, 허수아비처럼 껍데기만 남았던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말았다.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총영사관은 관내 한인들 관할권을 가진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흉사는 한인 거류지를 교외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1909년 가을 개척리에서 콜레라가 유행해 한인 남녀 100여 명이 죽었다. 도시 거주민 8만 명에서 유독 개척리 한인만 그런 화를 입었다. 현지 조사한 러시아인 지방 관료는 전염병의 원인을 불결한 주거 환경에서 찾았다.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한인 거류지는 극도로 좁고 더러우며 위생 상태가 중국인 거류지와 마찬가지다. 결벽성이 있는 저 한인들로 볼 때는 참으로 불가사의하다”고 적었다.①
1911년 3월 연해주 행정 당국은 한인 거류지를 시외 외딴곳으로 이전할 것을 결정했다. 그즈음 국경 너머 중국 길림성에서 다시 전염병이 생기자 나온 대응책이었다. 개척리는 시유지에 당국의 양해를 얻어 건립된 집단 주거지였다. 그 때문에 소정의 임대료를 내면 합법적으로 거주할 수 있었다. 거류지 이전을 위한 대체 부지가 제공됐다. 옛 개척리 북쪽 고개 너머 산비탈에 위치한, 아무르만을 바라보는 경사진 곳이었다. 지금이야 블라디보스토크 도심에서 멀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도시 외곽 경계선을 벗어난 궁벽진 곳이었다. 그곳을 한인들은 ‘신개척리’ 또는 ‘신한촌’이라고 불렀다. 이주는 그해 5월부터 이듬해까지 서서히 이뤄졌다.
정순만의 출옥은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사회의 분위기를 더욱 차갑게 했다. 양성춘의 죽음을 동정하는 이들은 원통해했다. 아무 죄 없이 목숨을 잃은 것도 억울한데, 관청 교섭력의 우열로 재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 못내 분했다. 피살자의 아내 전소사가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현지 발행 한글 신문 (1910년 9월1일치)에 기고문을 실어, 가해자 비호 그룹이 있음을 폭로했다.
고의적 살인 행위가 분명하지만, 이를 부인하는 조직적 움직임이 있다는 말이었다. 공공연히 과실치사설을 유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무슨 협잡을 꾸미려는 짓인가? 아무런 잘못도 없다 하니, 죄 없는 사람을 또 죽이려는 책동인가?” 젊은 아내는 이렇게 힐난했다. 특정인을 지목하기까지 했다. ‘이민복’이란 자가 과실치사설을 퍼뜨리는데, 그 이유를 밝히라고 했다.
또 다른 비극의 잉태, 정순만의 출옥이민복도 망명자였다. 대한제국의 전직 경찰 관료의 자제로, ‘일한병합’에 반대하는 성명회 선언서 작성에 참여했고, 반일단체인 국민회와 권업회에도 참가한 반일 운동자였다. 일본 헌병대의 정보 기록에 따르면, 이민복은 정순만 그룹의 일원이고 그 그룹의 리더인 이상설과 거취를 같이한다고 했다.②
양성춘을 동정하는 이들은 정순만이 풀려나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 또 다른 비극이 잉태됐다.
1911년 6월21일이었다. 정순만이 옥고를 치르고 출감한 지 넉 달이 지났다. 아침 8시, 이른 시간이었다. 연중 해가 가장 길 때라 날이 밝은 지 꽤 지났다. 정순만은 장 보기 위해 가게를 찾았다. 우연히 양덕춘을 만났다. 고인이 된 양성춘의 친형이었다. 껄끄러운 상대였다. 뜻밖에도 그가 부드럽게 다가왔다. 과거 일은 돌이킬 수 없으니 잊어야 할 터이고, 산 사람들은 한마디 얘기라도 나눠야 하지 않겠느냐며 자기 집으로 가자고 이끌었다.
양덕춘의 집에서 세 사람이 대면했다. 고인의 아내 전소사까지 합석했던 것이다. 일본 경찰이 작성한 정보 문서에 따르면, 분위기는 험악했다. 젊은 여인은 거세게 압박했다. “무슨 이유로 너는 내 남편을 살해했느냐, 내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라”고 요구했다. 정순만이 선선히 응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순간, 여인은 어딘가에서 도끼를 꺼내들었다. 여인은 정순만에게 거듭 타격했다. 머리 외에 여러 곳을 맞은 정순만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사이 양덕춘은 계속 정순만을 붙들고 있었다.
사건이 벌어진 뒤 양덕춘은 결심했다. 경찰 당국에 자수하겠다고 나서는 제수씨를 말렸다. 희생자의 형인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관할 경찰서 제4분서에 자진 출두해 자신이 흉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③
보복 살인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쇼킹한 뉴스였다. 현장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정순만의 가까운 동료인 이상설도 한달음에 왔다. 현장엔 경찰이 배치됐다. 경찰은 이상설의 출입을 막지 않았다. 피살자가 자신의 동생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참혹한 사건 현장을 확인한 이상설은 망연자실했다. 또 분노했다. 참혹한 현장 모습에도 그랬지만, 사태를 이 지경까지 몰고 가는 사람들이 미웠다. 때마침 사건 현장에 황공도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미운 마음이 치솟았다. 알은체를 하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는 양성춘 지지 그룹의 유력한 일원이었던 것이다.
이상설과 안창호의 대립정순만 피살 사건도 사적 범죄로 간주되지 않았다. 한인 사회의 내분과 관련된 음모라고 보는 사람이 많았다. 이제 상황이 뒤집어졌다. 정순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분노를 터뜨렸다. 이상설이 지도자인 이 그룹은 러시아 관청의 힘을 빌렸다. 러시아 관청 교섭력에서는 이 그룹이 월등했다. 이는 역사가 계봉우가 논평한 바 있다. “기호파의 수령인 이상설이 러시아 헌병대 하바롭스크 정탐부의 촉탁으로 있으면서 자기의 파를 거기에 많이 배속한 것은 그의 평생 역사로 보아 결점”이라고 평했다.④
정순만 사건은 민족해방운동의 기반을 허물어뜨리는 계기가 됐다. 살인사건의 배후 조종 혐의로 네 한인이 러시아 관청에 고발당했다. 안창호, 정재관, 이강, 김성무가 그들이었다. 면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밀결사 신민회를 주도해 애국계몽운동의 주역이 됐던 안창호가 첫자리에 보인다. 그는 1910년 국외로 망명한 이래 연해주를 거점으로 국권회복운동의 중·장기적 전개를 도모했다. 정재관과 이강, 김성무는 외국 한인들의 광범한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국민회 운동의 지도자였다. 정순만 지지자들은 이 네 사람이 살인사건을 교사했다고 의심했다.
러시아 헌병대는 네 사람에 대한 구인장을 발부했다. 살인교사 혐의였다. 체포 위기에 직면한, 국민회 운동의 지도자들은 일단 피신하기로 결정했다. 안창호는 페테르부르그와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가기로 작정했고, 이강과 정재관도 연해주 밖 자바이칼주로 피신했다.
결국 개척리의 두 살인사건은 한국 독립운동에 치명상을 입혔다. 운동권의 두 중진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다. 바로 독립운동의 예기를 꺾어버린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에 걸쳐 해외 한인들의 폭넓은 네트워크를 형성하려던 거창한 노력이 좌절됐다. 각지에 국민회를 결성하고, 그를 통해 반일 역량의 통일을 도모하던 움직임이 분열되고 위축됐다. 국민회 기관지로 발간되던 도 폐간됐다.
국권회복운동의 끝 모를 추락국권회복운동의 두 영웅이 서로 등을 졌다. 헤이그 특사 사건의 주인공 이상설과 신민회의 리더 안창호는 더는 협력하기를 꺼렸다. 그들은 고작 ‘기호파’ ‘서도파’라는 소규모 비공식 추종자 그룹의 대표일 뿐, 국권 회복의 중·장기적 전망을 제시하는 큰 지도자로 여겨지지 못했다. 가까운 동지였던 사람들이 이제 편을 갈라 서로 적대했다. 민족해방운동은 침체기를 겪어야 했다. 개척리의 두 살인사건은 망국 전후 국권회복운동의 끝 모를 추락을 상징하는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대립물로 전화하지 않는 사물은 없는 법이다. 비록 자신의 과오로 실패와 좌절을 겪었음에도, 인간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해방 의지 말이다. 해가 바뀌는 1912년, 정초부터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사회는 침체를 딛고서 국권회복운동의 활발한 기지로 되살아났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① В.Граве. Китайцы, Корейцы и Японцы в Приамурье, Хабаровск, 1912; 南滿洲鐵道株式會社庶務部調査課 日譯, , 大阪每日新聞社, 147쪽, 1929년
② 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1913년 3월3일; 정태수, ‘국치 전후의 신한촌과 한민학교 연구’, 1189쪽, 1992년
③ 在浦潮斯德 總領事代理 二甁兵二, ‘機密鮮 제43호, 鄭淳萬 殺害에 관한 報告’ 1911년 6월27일,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3
④ 계봉우, ‘꿈속의 꿈’,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373쪽,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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