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자료
아이 유치원 때인가 이웃이 아이들 데리고 하루이틀 자고 오는 여행을 제안했다. 나는 “글쎄요, 우리가 그렇게 친한지 잘 모르겠네요”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나와 내 아이다. 피붙이라고 꼭 좋은 여행 동반자는 아니거든.
잠시 당황한 이웃은 표정을 풀면서 한 방을 날렸다. “돌아보니 그런 것도 같네요.” 그래, 나 길바닥에서 애 잡은 거 생각하면 동네 창피해 이사도 모자라고 이민 가야 하는 여자다. 서로의 육아기 흑역사를 잘 아는 이웃은 내 말의 행간도 읽었을 것이다. 1. 좀더 크면, 애 떼놓고. 2. 내 자식도 버거운데 네 자식까지 서로 더 얹어야겠니?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엄마들은 엄마들끼리 친하면 된다. 꼭 크로스로 친할 필요까지는 없다.
초등 고학년만 돼도 모녀 커플 여행이 나쁘지 않다. 그런데 그때 되면 아이가 안 따라나선다. 품을 벗어난 거다. ‘삼신할머니 10년 보호설’과 ‘십이간지 한 바퀴가 왜 12년인지’ 키워보니 알 것 같다. 각각 천지 분간되고(문단속 잘하고) 자력갱생되는(밥 해먹을 줄 아는) 터닝포인트 지점이랄까.
좋은 여행 파트너는 취향과 체력이 잘 맞는 사람이다. 솔직히 찰떡처럼 맞는 사람은 드물다. 어지간하면 의사 표현 명확하고 짐 많이 갖고 다니지 않는 사람이 그나마 최선이다.
낯선 환경에서 평소와 다른 기운을 써야 하는 게 여행이다. 충전도 잘되지만 방전도 쉽게 된다. 이때 호불호를 분명히 해주지 않으면 상대는 그것까지 헤아리느라 불필요한 판단노동, 감정노동을 해야 한다. ‘나를 따르라!’ 앞장서길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뭐 먹을래?” “아무거나.” “이거 할까?” “상관없어.” 이런 대응에 복장 터진다. 입맛이나 씀씀이처럼 타협되지 않는 부분일수록 의견을 정확히 내거나 가르마를 잘 타는 게 좋다. 그럼 나는 저기서 맥주에 생선구이 먹을게 너는 여기서 주스에 샌드위치 먹으렴, 40분 뒤에 어디서 만나자, 이런 식의.
2박3일 온천 여행이나 올레길 걷기에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오는 것도 당황스럽다. 너의 짐은 너만의 짐이 아니다. 여행지에선 종종 도망갈 곳도 숨을 곳도 없는 상황에 놓인다. 본의 아니게 24시간 붙어 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깨진 커플 한둘이며 버린 우정 또한 한둘인가. 식당처럼 잠깐이라도 브레이크타임을 확보하는 게 필수다. 제일 나쁜 것은 나랑 여행 가서 지난번 여행 같이 갔던 다른 이를 흉보는 것이다. 이번 여행도 아닌 지난 여행의 불평불만까지 왜 들어야 하나. 게다가 나 없는 다음 여행에서는 과연 어떨까.
호불호를 분명히 하거나 배려하는 태도는 ‘관계의 책임성’을 말해주는 좋은 단서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만날 때 되지 않았니? 동만 떠놓고는, 언제 어디서, 메뉴나 동선은, 번번이 노 코멘트인 사람이라면 밥값 계산도 나 몰라라 할 가능성이 높다.
한 친구는 웬일인지 어느 날 먼저 ‘요즘 날 좋으니 인왕산 둘레길이라도 걷자’고 제안해놓고는 떡하니 킬힐에 옷을 빼입고 나타났다. 저기, 인왕산에서 결혼식 있니? 차려입어 걷기 힘든 그 친구 때문에 우리는 모두 그 화창한 날 인왕산은커녕 그 아래 경복궁도 걷지 못하고 역 근처 카페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그 친구가 교통편이 좋았다는 것 말고는 거기서 그렇게 만난 이유를 모르겠다. 둔하고 이기적인 태도는 흘러넘치기 마련이라(그래 맞다. 그날 그 친구의 SNS에 절대 올라오지 말아야 할 사진이 올라왔다. ‘#나와 오랜 친구들. 찰칵’이라고 달았지만 누가 봐도 ‘#나와 늙은 무수리들. 메롱’에 가까웠다), 그 친구가 계 부어 장거리 여행 가자고 몇 년째 노래를 부르지만 아무도 호응하지 않는다.
몇 차례 유사한 일화를 겪으며 나머지 친구들은 더 돈독해졌다. 역시 길든 짧든 여행은 사람을 잃게도 하지만 얻게도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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