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싯적에 엄마가 화나서 “이럴 거면 당장 집을 나가라”고 고함칠 때, 오빠언니들 뒤에서 벌벌 떨었지만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에이, 말은 저래도 설마 자식을 진짜로 내쫓고 싶겠어?’ 내가 자식을 키워보니 알 것 같다. 그때 그 시절 엄마의 고함에는 일말의 진심이 담겼다는 것을.
모성은 감정이 아니다. 본능도 아니다. 의지다. 엄마 노릇은 전적으로 ‘구력’에 달렸다. 1만 시간의 법칙이 맞다면 어느 장르보다 잘 들어맞을 것이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진정한 미래지향적인 아이를 키우면서 새삼 의지로 낙관한다. 시계는 돌아간다. 우리 인간적으로 이것 좀 하자, 했을 때 “엄마, 우리 그냥 인간 하지 말자”는 아이는 한술 더 떠 “크느라 여기저기 안 쑤시는 데가 없다”며 드러눕는다. 그게 갱년기를 앞둔 나에게 할 소리인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너무 잘해준 것 같다. 호강에 겨우면 요강에 똥 싼다더니,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안 되겠다. 네가 나를 궁금하게 만들어야겠다. 스텝 1.
너의 성장기 세뱃돈과 뜻있는 친·인척의 단계별 금일봉은 어디로 갔는지 묻지 마라. 연초에 짝으로 들여놓은 연태고량주 대자의 가격도 알려고 하지 마라. 내 두피와 각질 관리를 위한 용품과 서비스 비용의 출처도 비밀이다. 궁금해야 청춘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머릿결이 빤짝이는 네 나이 때는 눈에 보이는 곳 위주로 꾸미고 가꾸지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머리카락이 빠지는 내 나이가 되면 눈에 잘 띄지 않는 곳부터 챙겨야 한다. 그렇다고 마음, 영혼 이런 곳은 아니다.
너의 취향을 존중한다. 스텝 2.
인간이 매 끼니를 먹어야 한다는 건 편견일 수 있다. 긴 겨울방학, 네 입 주변이 허옇게 일어나는 것을 보며 그간 학교 급식이 얼마나 균형 잡힌 식단이었는지 나도 깨달았다만, “엄마가 오늘 맛있는 거 해줄까?” 물었을 때 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 그냥 맛있는 거 사먹자”라고만 하지 않았어도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조금은 달랐을지 모른다. 아무튼 너는 이제 밥벌이는 못해도 밥상은 차릴 때가 됐다. 네 입맛대로 차리렴.
공정하자. 스텝 3.
또래끼리 지지고 볶는 게 일과인 소녀시대에 접어든 너는 유독 민감해 보인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위로는 “아이고 걔가 왜 그런다니. 근데 두고 봐봐. 분명 더 나쁜 점이 보일 거야”이다. 입 내밀고 있던 너는 어이없어한다. 빈말 아니다. 사람은 어지간해선 바뀌지 않는다. 그럼에도 서로를 감당하는 것은 관대해서가 아니라 익숙해서다. 공부한 만큼 성적 나온다. 사랑한 만큼 사랑받는다. 네가 뭐라고 넘치게 받으려 드니.
이 스텝 원투스리는 파트너에게도 해당된다. 사춘기에 접어든 자식과 ‘사추기’를 지나는 배우자의 행동거지는 때와 상황과 장소만 바꾸면 꽤 싱크로율이 높다. 굳이 왜 둘을 세트로 묶느냐고 묻는다면, 너에게 꿈이 있듯 나에게도 꿈이 있다고 대답하련다. 내 장래 희망은 현모양처거든. 장래에 말이다.
애는 애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자기 객관화’와 ‘균형감’이 중요하다. 힘껏 달려온다고 달려왔는데 어느 날 문득 한숨이 나온다면, 나는 누구인가 싶다면, 그럼에도 세상 눈치가 보인다면, 거울을 보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봐봐, 당신이 주연급 생김새는 아니잖아. 생각보다 세상은 당신에게 관심 없어. 그러니 주눅 들 것 없어. 요즘 애들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할 것도 없고. 걔들도 당신이 왜 그러는지 몰라. 우리가 일찍이 ‘부장님들’의 그 무수한 취미와 특기를 다 이해해서 웃어드린 거 아니잖아.
부모자식도 마찬가지다. 저절로 예쁜 사이는 없다. 단 서로를 중요하게 여겨주는 한, 관계의 성장판은 닫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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