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 소년은 아버지, 동생과 함께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넌다. ‘만세후’(萬歲後·1919년)였던 탓에 조선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소년의 조선행은 시집간 누나(남편은 용산역 역장이었다)에게 얹혀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누나에게도 자식이 많았기에 결국 각기 다른 가정의 양자로 보내졌고, 향수병을 이기지 못한 그는 결국 다음해 홀로 현해탄을 건너 아버지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때 그의 나이는 10살.
이후 가출하여 도쿄에 있는 방직공장에서 일하지만 열악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 갈 곳이 없어지자 다시 조선으로 건너가 누나에게 한동안 몸을 의탁한 뒤, 인천에 있는 철공장에 취직한다. 이즈음 관동대지진(1923년)이 일어나 아버지가 죽지만 악랄한 주인 때문에 일본에 갈 수 없었고, 밤새 이불 속에서 운다. 그러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어느 날 무작정 뛰쳐나와 경성을 향해 걸어가던 중 의식을 잃고 눈밭에 쓰러진다. 눈을 떠보니 한 조선인의 농가. 소년은 극진한 보살핌에 기력을 회복하고 경성에 무사히 도착한다.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청년노동자로서 당시 활발했던 노동쟁의에 가담하지만, 이내 회의감을 느끼고 우익단체에 가입한다. 그리고 천황 직소 사건 등 여러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을 제집처럼 드나든다. 그러던 그가 자신의 숨은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한 우익 거물의 소개로 중국으로 건너간 뒤다. 그곳에서 그는 허용회사를 설립하여 전쟁물자가 부족했던 일본군을 지원하는 일을 맡았는데, 그 과정에서 폭력과 협박은 물론 아편 장사에도 적극 뛰어들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A급 전범으로 체포됐지만, 구치소에서는 ‘나는 패했다’라는 공술서를 작성하여 사회주의 세력의 확대에 대한 우려와 미군에 대한 신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결국 그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협력하는 조건으로 약 2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된다. 그리고 무대 뒤에서 막대한 비자금을 기반으로 일본의 정·재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데, 무려 반세기 동안이나 일본을 지배한 자민당의 탄생에도 깊이 관여한다.
이런 그가 1960년대 초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던 한국을 다시 찾는다. 그리고 한일기본관계조약(1965년)의 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특히 김종필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도 1976년 일본열도를 뒤흔든 록히드 사건으로 양지에 모습을 드러내고, 판결이 나오기 직전인 1984년 사망한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에서 그를 ‘기토 고타’라고 불렀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에서 ‘선생’이라고 불렀다. 참고로 그는 고다마 요시오(児玉誉士夫)라는 이름을 가졌다.
조영일 문학평론가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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