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그러니까 와우아파트가 무너지고 남영호가 침몰한 해) 11월22일(그러니까 전태일(왼쪽 사진)이 분신하고 9일 뒤), 30대 중반의 한 ‘교육공무원’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처음 타보는 비행기인지라 서서히 찾아온 이통(耳痛)에 당황해 수천m 상공에서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지만, 아픔이 견딜 만해지자 차창으로 푸른 현해탄이 눈에 들어왔고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부관페리(1970년 6월19일부터 운행 시작)처럼 보이는 배도 눈에 띄었다.
그가 하버드 옌칭의 연구지원을 받아 도착한 일본의 모습은 ‘별세계’였다. 고도 경제성장의 정점에 도달한 당시의 일본은 전공투 운동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였다. 야스다(安田)강당은 새까맣게 불에 그슬려 있었고 대학 곳곳은 구호와 플래카드로 가득했다. 사흘 뒤 그는 유명한 소설가가 자위대 건물에서 쿠데타를 외치고 있는 장면을 TV로 시청한다. 참고로 이때 대학생이었던 무라카미 하루키도 학생식당에 설치된 TV를 통해 같은 것을 보았지만 시큰둥하게 반응한다. 미시마 유키오는 그날 자결한다(11월25일·오른쪽 사진).
그가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대학도서관에서였다. 어두컴컴한 서가에는 한국에서는 접할 수 없는 자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국’이 펼쳐졌다. 그는 일본 체류를 그 자료들을 필사하는 데에 바친다. 그리고 이후 이 자료를 토대로 근대문학연구 박사 제1호 논문을 완성한다. 이 논문은 (1973)로 출간되어 한국 근대문학 연구의 초석이 된다. 이후 그는 수많은 제자들(이 제자들은 이후 문학교육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한다)을 길러냄으로써 한국 근대문학 연구의 거목(巨木)이 된다.
그런데 2000년 한 대학원생이 그가 일본의 비평가 K를 표절한 점을 지적하면서 그가 현해탄 콤플렉스에 갇혀 있다고 주장한다. 이때 몇몇 그의 제자들은 스승을 보호하기 위해 과잉반응을 하는데, 진보적인 학자로 평가받은 어떤 이는 친절하게도 “아직 박사 논문을 쓰지 않아서 잘 모르는가본데…” 하면서 지그시 눌러주었다.
올해 초 나는 K 선생의 집을 방문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때 우연히 그의 이야기가 나왔다. K 선생은 이와 관련하여 “안됐다”(氣の毒だ)고 표현했다. 그와 같은 일은 근대문학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으로,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글이 표절된 것에 대한 기분 나쁨보다는 그로 인해 상대방이 받았을 비난과 피해를 염려했다. 그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행인지 불행인지 그가 그런 것으로 흔들릴 위치에 있지는 않습니다.”
조일영 문학평론가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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