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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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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의 중국요리 알레르기

물려받은 슬픔
등록 2015-10-31 03:42 수정 2020-05-03 04:28

1944년은 학도병, 징병 등의 형태로 수많은 젊은이가 전장으로 보내지던 시기였다. 전황이 워낙 좋지 않은 시기인지라 열외가 거의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인에게 일개 병정이 되어 전장에 나간다는 것은 다른 말로 관부연락선에 승선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동남아 전선이든 중국 전선이든 일단 조선에 집결하여 배나 기차로 각 부대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마쓰모토 세이초와 마루야마 마사오가 식민지 조선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이처럼 열심히 병정을 실어나르던 관부연락선에는 국문학을 공부하는 교토제대 대학원생도 타고 있었는데, 그가 배치된 곳은 중국 전선이었다. 그곳에서 그가 무엇을 하고 또 무엇을 경험했는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전쟁이 끝난 뒤 작가나 문학연구자가 아닌 그저 평범한 국어교사로서 일생을 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들의 기억에 근거하여 그때 그가 무엇을 경험했는지 조심스럽게 추측해볼 수는 있다.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란 평생 지속된 어떤 습관과 관련이 있는데, 그것은 아침 식사 전 불단 앞에서 정좌한 채 기도를 하는 모습이었다(참고로 아버지는 정통종계 스님의 아들이기도 했다). 너무나 엄숙했던 탓에 아들은 감히 방해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느 날 아들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기도하시는 거죠.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 전장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다. 알쏭달쏭한 이야기였다. 아버지가 중국 경험과 관련하여 딱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당시 아들은 너무 어렸던 터라 무슨 이야기인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목격담일 수도 있고 당신의 손으로 한 일일 수도 있었는데, 여하튼 매우 슬픈 이야기였다는 느낌만은 기억하고 있다. 아들은 말한다. “아버지가 중국요리를 드시지 못하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민음사 제공

민음사 제공

아들은 대학 진학과 함께 집을 떠나 도쿄에서 자취를 하게 된다. 단카이 세대가 대부분 그러했던 것처럼 그도 아버지와 소원하게 지낸다. 아버지에 대한 관심을 갖지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중년이 되자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된다. “아버지에게 중국 경험은 분명 마음의 상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내게도 상처입니다. 아버지와는 관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낳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내 피 속에는 그의 경험이 녹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무라카미 지아키(村上千秋), 공식적으로 한 편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경험은 아들의 소설만이 아니라 미각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팬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하루키(사진)는 중국요리에 극단적인 알레르기가 있다.

조영일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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