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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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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에게 배우는 ‘인생의 걸음마’

요리와 살림·텃밭·자식·남편 이야기 녹아 있는 할멈의 블로그들…

그곳엔 삶의 통찰, 더불어의 참뜻, 다독여주는 뜨듯한 마음이 있더라
등록 2014-11-29 15:35 수정 2020-05-03 04:27
19일 경기도 용인 요리연구가 김옥란 씨. 사진 류우종 기자

19일 경기도 용인 요리연구가 김옥란 씨. 사진 류우종 기자

‘꿈꾸는 할멈’ 김옥란(62)씨는 환갑에 블로그를 시작했다. ‘꿈꾸는 할멈’은 할멈이 직접 지은 블로그 이름이다. 요리선생으로 살아온 지 30년. 1만 개의 레시피가 관리를 맡긴 사람의 연락 두절로 다 사라졌다. 60여 년의 세월을 살아온 할멈은 화내는 건 뒷전이고 그 레시피를 복원해야겠다는 생각에 블로그를 열었다. “어차피 재료나 요리법을 요즘 트렌드에 맞게 조금씩 바꾸긴 해야 했어요.” ‘보살’ 할멈이다. 블로그를 열기 전 정리 작업도 하나 했다. “죽을 때까지 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던 이들이 있었어요. 저한테 굉장히 잘못한 친구 한 명과, 또 잘못한 제자. 그들과 관계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편지처럼 긴 카톡을 보냈어요. 답도 오가고. 그렇게 해묵은 앙금까지 정리하자 굉장히 편안한 마음이 되었어요. 누구한테 숨길 것도, 가식을 떨 것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할멈 블로그엔 가식·거짓·과시·앙금 같은 건 없다. 매일 블로그를 방문하는 사람이 1만 명에 이른다. 환갑 지난 파워블로거다.

세월이 깃든 삶의 구력

할멈의 블로그엔 맛있는 것이 가득하다. 1만 번은 구운 애플앤젤케이크는 “겁나 맛있겠”고, “달큰한 사과의 향을 늦가을 마당에 가득” 풍긴다. 오렌지소스의 고구마 맛탕, 들기름에 지진 햇고구마 부침개 같은 달콤한 간식은 물론 따끈한 부추달걀탕, 두부들기름구이, 호박눈썹나물볶음, 묵은무 무침 등 건강밥상 요리까지 가득해 마음이 뜨뜻해진다. 여기에 오랜 꿈이었던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간 뒤 가꾸는 텃밭 재미, 재단하고 뜨고 꿰매어 ‘짠’ 하고 만들어낸 할멈의 바느질과 뜨개질 작품까지 보노라면, 할멈은 무슨, 새댁처럼 깨 볶는 냄새가 진동한다.

아기자기한 살림 솜씨와 음식 솜씨를 뽐내는 블로그야 많다. 그러나 할멈의 블로그엔 세월이 깃든 삶의 구력이 요리와 살림, 텃밭, 가게, 자식, 남편 이야기 사이사이에 녹아 있다. “시간이 지나가고 보니 음식은 맛보다는 추억”이고, “잡초는 받아들여야 할 상대, 맞짱을 뜰 상대가 아니”다. 투덜대는 할아범과는 “미운 대로 산다. 미운 만큼 의지하는 마음도 똑같이 크다. 할아범도 어떤 날은 마누라가 예쁘고 대견하다가도 또 어떤 날은 ‘저 할망구, 저 성질머리’ 하며 분통 터질 테니까”.

부산에 사는 이옥선(66)씨가 홈페이지를 통해 글을 쓰는 블로그 이곳저곳에서도 삶의 통찰이 빛난다. 이씨에 따르면 요즘의 고부갈등·부부갈등·부모자식갈등의 상당수는 아파트 가옥 구조 탓이다. “요즘 같은 아파트 구조에서는 마누라가 눈 튀어나오게 바삐 몰아치며 밥하고 청소하고 아이들 돌보는 가운데 남편이라는 사람이 모른 척하고 있거나 게임이라도 하고 있으면 당연히 부부 사이에 싸움이 나고 말 것이다. (중략) 집이라는 것이 각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게 생겨야 하는데 아파트라는 곳은 방이 따로따로 되어 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한방에 사는 것과 다름없다. 문이라도 쾅 닫으면 단절감은 더 커진다. 그러니 서로의 시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어서 서로가 빅브러더가 되는 것 같다.” 그는 “너무 가족의 속을 어항 속처럼 속속들이 들여다보려 하지 마라”고 조언한다. 드라마의 마지막 회를 좋아하는 이유나 품격 없는 광고 욕을 들으면 속이 시원해지기도 한다.

할머니는 요술쟁이

이 할머니들은 삶에서 타인을 늘 배려한다. ‘꿈꾸는 할멈’ 김옥란씨는 오스트레일리아 요리학교에서 공부하고 온 아들이 낸 한정식집에서 점심·저녁 시간에 일을 거든다. 할멈이 거드는 시간에 가장 신경 쓰는 건 직원들 챙기기다. 아들이 “엄마가 이모들(식당 직원)에게 신경 쓰는 것 10분의 1만 손님에게 신경 쓰면 정말 대박일 거야”라고 말할 만큼. 그러면 할멈은 “야, 그럼 각자의 집보다 우리 가게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은 사람들인데 신경을 10배로 쓰는 게 당연하지” 한다. 직원들의 먹거리, 손님 대하며 겪는 스트레스 등에 할멈은 누구보다 민감하게 배려한다. 이옥선 할머니는 17년 된 고물차를 끌고 다닌다. 17년 됐지만, 동네만 살살 다녀서 주행거리는 12만km밖에 되지 않는다. 고물차라 누가 살짝 박거나 긁어도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 아파트 앞에 주차해뒀는데, 누군가 살짝 긁었다고 연락이 왔다. 할머니가 보니 그간 여기저기 긁힌 흔적에 살짝 스크래치 하나 더 있는 정도여서 “괜찮네요” 하자, 그는 매우 고마워하며 과일 두 상자를 보냈다. 할머니는 “내가 만약 고가의 외제차를 몰고 다닌다면 작은 스크래치 하나에도 발끈해가지고 그렇게 한 사람에게 물어내라고 할 테고 상대방은 아마도 나를 싸가지 없고 돈만 있는 할마씨라고 생각할 것이니 그건 좀 재미없는 세상이 될 것 같다. (곧 죽어도 능력이 없다는 말은 안 한다.) 고물차를 끌고 다니고 명품백도 없지만 나는 내 자동차 라이프 스타일이 명품이라고 자부한다. (잘난 척이 쩔어요. 호홋.)”이라고 썼다. 배려와 이해를 ‘잘난 척’으로 눙친다.

‘꿈꾸는 할멈’ 김옥란씨가 아들과 함께 운영하는 한정식집 ‘해밀’의 요리. 요리 하나하나에 정성을 기울인다. 그림책  〈할머니에겐 뭔가 있어!〉는 요술처럼 끊임없이 자 식과 이웃에게 먹거리를 건네는 할머니의 비밀을 얘기한다. 류우종 기자 , 사계절 제공

‘꿈꾸는 할멈’ 김옥란씨가 아들과 함께 운영하는 한정식집 ‘해밀’의 요리. 요리 하나하나에 정성을 기울인다. 그림책 〈할머니에겐 뭔가 있어!〉는 요술처럼 끊임없이 자 식과 이웃에게 먹거리를 건네는 할머니의 비밀을 얘기한다. 류우종 기자 , 사계절 제공

할머니에겐 뭐가 있는 걸까. 그림책 (사계절)는 할머니를 요술쟁이로 그려낸다. 쌀밥에 썩썩 비벼먹는 나물무침, 하얀 눈송이 같은 옥수수 뻥튀기, 고소한 땅콩, 쫀득쫀득 곶감…. 할머니에게선 먹을 게 끝도 없이 나온다. 할머니에게 “어디서 샀냐”고 물으면 “사긴 어딜 사. 마당에서 뽑았지, 나무에서 땄지” 한다. “잔말 말고 먹기나 해” 한다. 작가 신혜원씨는 그림책에 나오는 할머니에게 이것저것 얻어먹는 아이가 “바로 저예요”라고 말했다. 신혜원 작가는 올해로 하늘의 뜻을 안다는 쉰인데 말이다. 10년 전 충북 제천 월악산 아래로 귀촌했다. 도시에서만 살던 신 작가는 할머니들로부터 먹는 것, 입는 것을 비롯해 생활의 모든 것들을 빚지고 산다. “도시에서 살 때는 다 돈 주고 사는 어떤 것이었는데 시골에서 살아보니 다 할머니의 노동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걸 다 나눈다. 귀찮아서 읍내 식당에 가서 사 먹으려고 하면 앞집 할머니가 ‘바깥에서 먹지 말고 이걸로 밥 해먹으라’고 나물무침 같은 걸 주신다. 여기서는 굶어죽으려고 해도 굶어죽기 어렵다.” 신 작가가 그림책을 통해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산다고 생각하는 것의 기저에는 다 ‘우리네 할머니들’의 노동이 깃들어 있다는 것 그걸 다르게 말하면 사랑과 관심”이라는 내용이다.

“부지런금지법을 만들면 어떨까”

할머니들은 너무 열심히 살려고 애쓰지 말라고 말한다. 꿈꾸는 할멈에게 요리 30년, 블로그도 3년째 꾸준히 즐겁게 하는 ‘작심삼일에 그치지 않는 비결’을 묻자 돌아온 답은 “비법이 어딨어”다. “절박해서 한 거다. 30년 요리 선생을 한 건 남편 월급만으로는 애들을 키우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3년 동안 꾸준히 블로그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1만 개의 레시피, 내 청춘을 바친 레시피를 잃어버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거 다 복원해야만 했다.” 대신 할멈이 덧붙인 말이 있다. “내 생각에 작심삼일에 대해서 너무 스트레스 받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작심삼일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권리 같은 거다. 작심삼일 했다가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작심삼일을 시작하는 건 끊임없이 자기반성을 하는 거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면 물이 다 빠져버리는 것 같지만, 콩나물은 매일매일 자라고 있다. 작심삼일을 반복하는 것도, 보이지는 않지만 자라고 있는 거다.”

요리에 이어 바느질에 한창인 김옥란씨. 블로그를 토대로 펴낸 책 은 요리는 물론 바느질법도 알려준다. 블로그글 여기저기서 삶의 통찰을 뽐내는 부산 할머니 이옥선씨. 포북출판사 제공 , 이옥선 제공

요리에 이어 바느질에 한창인 김옥란씨. 블로그를 토대로 펴낸 책 은 요리는 물론 바느질법도 알려준다. 블로그글 여기저기서 삶의 통찰을 뽐내는 부산 할머니 이옥선씨. 포북출판사 제공 , 이옥선 제공

이옥선 할머니는 “부지런금지법을 만들면 어떨까” 한다. “한마디로 너무 부지런을 떨어가며 살고 있지나 않은지. 좀 느긋하면 좋을 것 같은데 매스컴들이 부추겨서 사람들에게 어딘가 가서 무엇인가를 즐기지 않으면 손해라도 볼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든다. 우리 산은 그 덕에 늘 몸살이다. 군복무하면서 굳이 대학원을 이수해 시간을 아낌없이 썼다는 사실에 뿌듯해하고, 다른 사람은 한 번 붙기도 어려운 고시 3과를 모조리 다 붙는다. 엄연히 탄탄한 직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대기업의 사외이사도 되어 억대 연봉을 가져가고, 국회의원이 되고도 또 다른 직업도 끌어안는 슈퍼맨들…. 남들 하는 정년을 했으면 그냥 좀 여유롭게 지내지 굳이 능력 과시하려는 것처럼 낙하산을 타고 이곳저곳 내려앉아서 별별 이상한 ‘×피아’라는 조어를 만들어낸다. 이 사람들은 그야말로 ‘보람찬 인생’을 사는 걸까? 자신의 인생을 ‘보람찬 인생’으로 만들기 위해 어쩌면 누군가의 인생에 꼭 필요한 일을 구하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은 아닐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야 한다. 다 같이 잘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지나친 열심과 부지런함과 마당발과 기타 등등 극성스러운 ‘보람찬 인생’은 금지해야 한다. 이제부터 좀 느긋하게 좀 덜 부지런하게 또 좀 덜 보람차게 주말에도 집에서 뒹굴거릴 수 있는 자유라도 누리고 다 같이 한 템포씩 느리게 갈 수 있는 부지런금지법을 만드는 건 어떨까?”

“엄마고 친구이고 보호자”

할머니에게 할머니는 어떤 존재일까. 꿈꾸는 할멈에겐 할머니가 “엄마고 친구이고 보호자”였다. 할머니 손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할멈에겐 늘 응원이 되는 호사로운 기억이 있다. “할멈을 키워주신 할머니는 쌀항아리에서 쌀을 꺼내실 때 아주 특별한 행동을 하셨다. 식구 수대로 퍼낸 쌀양푼에서 다시 한 공기를 푸고 그것을 옆의 자그마한 항아리에 도로 부셨다. 어느 날 작은 항아리에 모인 쌀을 뽀얀 광목자루에 담고 어린 할멈 손을 잡고 절에도 가시고, 한길 건너 한약방에도 가셨다. ‘애가 배앓이를 잘해.’ 아직도 그 말만은 기억나는 것 같다. 검고 쓴 뜨거운 한약을 사기 국사발에 찰랑 담아주고 지켜서서 먹이셨다. 할머니와 찢어져 살게 되기 전까지는 한 해에 두 번은 그렇게 형편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호사를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빈속에 댓병에 든 토종꿀을 딱 밥 숟갈로 하나를 따라주셨고 맛도 보지 말고 삼키라 하셨다. (중략) ‘잘하는구나. 너는 소중하단다’ 뜨거운 한약을 마실 때도, 욱하며 토가 오를 정도의 단 꿀을 삼킬 때도 할머니는 어린 할멈에게 늘 이렇게 속으로 말씀을 하셨을 듯하다.”

사는 게 고단할 때, 너무 바빠 숨가쁠 때 ‘할머니 블로그’에 가보자. “잘하는구나, 너는 소중하단다” 다독여주는 뜨듯한 마음이 있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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