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불멸의 플라스틱 월드

등록 2012-11-30 17:37 수정 2020-05-03 04:27

28개. 반 평도 안 되는 사무실 책상 위에 놓여 있거나 현재 착용 중인 플라스틱 제품의 개수다. 책상, 의자, 칫솔, 칫솔통, 치약, 텀블러, 테이크아웃 커피 뚜껑, 노트북, 노트북 케이스, 마우스, 전선, 랜선, 멀티탭, 색연필, 볼펜, 전화기, 휴대전화, 이어폰, 부채, 명함통, 순간접착제, 가방, 운동화, 허리띠, 니트, 브래지어, 청바지, 점퍼 따위다. 플라스틱 성분이 없는 것이라곤 기자와 책뿐이다. 플라스틱 덕에 일상이 제대로 돌아가고, 일도 해낼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름도 알 길 없는 숱한 합성물질에 생활이 완전히 포위된 사실을 인지한 순간 무기력함과 섬뜩함이 느껴진다고 하면 유난일까.
플라스틱 대중화가 연 소비의 시대

프리랜서 과학 저널리스트이자 세 아이의 엄마인 수전 프라인켈이 쓴 (을유문화사 펴냄)도 마치 플라스틱빌(Plastic Vill·끼워서 조립하는 플라스틱 건물 세트 장난감)에 살고 있는 듯한 저자의 답답함과 위기감에서 출발한다. 플라스틱에 닿지 않고 하루를 보내려던 가벼운 실험이 아침에 일어난 지 10초 만에 화장실 변기 앞에서 허무하게 깨져버린 직후였다. 그때부터 그는 떼려야 뗄 수 없게 된 인간과 플라스틱의 관계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인간과 얽힌 복잡한 관계와는 달리, 플라스틱의 정의는 명쾌하다. 열이나 압력으로 인공적으로 형상을 변형시킬 수 있는 고분자 물질이나 여기서 만들어진 결과물을 뜻한다. 종류는 수만 개라는데 정확히 추정도 안 된다. 인공물질에 불과한 이 플라스틱의 진화는 미국 소비의 역사와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플라스틱은 미국이 아직 농업국가 색채가 강하던 1869년 처음 개발됐다. 인쇄공 존 웨슬리 하이엇이 당구공의 재료이던 코끼리 상아를 대체할 물질로 천연수지 플라스틱인 셀룰로이드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는 돈벌이를 위해 이 물질을 개발했지만, 의도하지 않게 중산층들이 오랜 자원 결핍에서 해방돼 소비의 쾌감을 맛보게 됐다. 상아·산호·보석·대리석 등 상류층이 독점하던 고급 소재를 똑같이 모방할 수 있는데다, 싼값에 거의 무제한으로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제프리 메이클은 에서 이를 ‘소비 민주화’의 계기로 지칭했다.

플라스틱 세상이 우연으로만 열린 건 아니다. 1920~30년대 석유화학 업체들은 돈벌이를 위해 새로운 합성수지 플라스틱을 개발하며 즉시 대량생산 시스템도 갖춰나간다. 아직 수요가 뒷받침되지 못한 때라 공급 과잉이었지만 얼마 뒤 2차 세계대전에서 낙하산, 항공기 부품, 군모, 원자탄 등으로 모두 소비된다. 전쟁이 끝난 뒤엔 호황이 가져온 수요 폭발로 생산이 더 늘어난다. 1940년 0에 가깝던 전세계 플라스틱 소비량은 최근 연간 2600억kg이 넘었는데 이 중 20%가량이 미국에서 쓰인다.

그러나 플라스틱 대중화가 열어젖힌 소비의 시대는 버리는 행위를 미덕으로 만들었다. 소비자가 편리함만 좇아도 지장이 없을 만큼 플라스틱은 값싸고 흔했다. 라이터나 면도기, 펜과 같은 일회용 제품이 전체 플라스틱 제 품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매일 버려 지는 이 플라스틱은 불멸에 가깝다. 바다에서도 땅에서 도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그런데도 소비자의 무관심으 로 미국의 플라스틱 재활용률은 7%에 불과하다. 전세계 쓰레기의 10%에 불과한 플라스틱 쓰레기가 우리 눈에는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아무리 치워도 계속 쌓이 는 비닐봉지나 낚싯줄, 타이어 등은 알바트로스·고래 같 은 동물을 죽음으로 내몬다.

더 안전한 플라스틱을 쓸 책임

인간도 플라스틱 탓에 평생 잠재된 위험에 노출된 채 살아가고 있다. 일부 플라스틱이나 첨가 화학물질이 인 간의 내분비계를 교란시켜 성장·생식·면역 등을 방해 하고 때로는 죽음에 이르는 질병을 일으킨다는 과학적 우려가 계속 제기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1970년대만 해 도 폴리염화비닐(PVC) 공장 노동자들이 발암물질인 염 화비닐가스에 노출돼 간암인 간혈관육종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종종 발생했다. 플라스틱의 유해성은 직접 생산 에 관여하는 노동자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일상적 으로 플라스틱을 접하는 평범한 소비자의 혈액에서 플 라스틱 성분이 채취됐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런데도 소비자의 안전성을 높이려는 법안은 번번이 플라스틱 제 조업체의 막강한 의회 로비로 무산돼왔다.

돌이키기 어려운 플라스틱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저자가 충고한 대처법은 두 가지다. 근본적으로는 플라 스틱 생산업체의 더 안전한 물질 개발이다. 사탕수수· 사탕무·옥수수 같은 식물을 원료로 만들어 분해도 잘 되고 유해한 물질은 적은 바이오 플라스틱을 생산하자 는 당부다. 이미 일부 업체는 상용화해 옥수수를 기반으 로 한 기프트카드나 비닐봉지 등이 일상에서 쓰이고 있 다. 다음은 소비자의 책임 있는 소비다. 가급적 플라스틱 을 덜 쓰고, 오래 쓰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직전, 영국 의 화학자 빅터 야슬리와 에드워드 쿠젠스는 이렇게 상 상했다. “‘플라스틱 인간’은 플라스틱 세상에서 마법사처 럼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 낙관 적인 화학자들의 예상은 절반만 맞았다. 플라스틱은 넘 쳐나지만 그만큼 위험도 커졌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