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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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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연대로 삶을 지키다

등록 2012-11-23 19:49 수정 2020-05-03 04:27

두리반.
그 이름처럼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는, 크고 둥근 상’이었다. 배고픈 이들이 둘러앉아 칼국수 한 그릇에 행복할 수 있는 흔한 밥집이었다. ‘직접 칼국수를 뽑고 만두를 빚고 김치를 담근다’는 소박한 철학으로 족한 서울 동교동 삼거리의 식당일 뿐이었다.

2010년 4월3일 두리반에서 열린 농성 100일 잔치 모습. 젊은 예술가들의 발랄한 연대는 두리반 농성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었다. 실천문학사 제공

2010년 4월3일 두리반에서 열린 농성 100일 잔치 모습. 젊은 예술가들의 발랄한 연대는 두리반 농성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었다. 실천문학사 제공

발랄하고 참신한 문화농성의 출현

유채림(52)씨가 쓴 (실천문학사 펴냄)은 대기업의 재개발 폭력에 맞서 끝내 삶의 터전을 지켜낸 한 칼국숫집의 투쟁 일지다. 특별할 게 없던 두리반은 어쩌다 철거민들의 ‘희망의 증거’가 되었을까.

정직하게 벌어 자식을 먹이고 가정을 건사하겠다는 안종녀(54)씨의 일터 두리반에 재개발 광풍이 분 것은 2007년 12월이었다. 가게가 자리한 서울 마포구 동교동 167번지 부근에 도시공항철도 역사가 들어서게 되자, 개발이익을 노린 건설사는 그 일대를 시세의 10배를 주고 매입했다. 두리반이 있는 3층 건물도 예외는 아니었다. 2008년 봄부터 11명의 상가 세입자들이 대책위원회를 꾸려 법정 싸움에 나섰다. 법원은 건설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건설사는 세입자들에게 이사 비용 300만원을 줄 테니 생계 터전을 버리고 떠나라고 통보했다. 통보에는 용역깡패의 폭력이 동원됐다.

2009년 12월. 깡패들이 가게에 들이닥쳐 집기들을 부수고 안씨와 남편 유채림씨를 들어 인도로 내쳤다. 그날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그 자리에 법은 없었다. 법은 깡패들을 보낸 대기업의 뒤에 서 있었다. 맹탕인 남편을 대신해 강단 있던 아내는 용역이 설치한 펜스를 거둬내고 농성을 시작했다. 소심하고 겁 많은 남편은 그렇게 아내 곁에서 비정한 세상을 향해 소리쳤다. 언제 다시 용역깡패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두렵고 추운 밤이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이 책이 철거민들의 처절하고 비장한 생존권 투쟁기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는 않다.

‘펑크록(錄)’이란 이름에 걸맞게 이 책은 철거민들의 절박한 생존권을 다루면서도 시종 씩씩하고 쾌활하다. 저자는 논픽션임에도 익살맞은 필체와 걸진 입담으로 531일 동안의 농성을 재미지게 묘사했다. 언제 철거될지 모를 불안 속에서 이어진 싸움이 지닐 법한 비장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이 싸움에 연대한 사람들의 면면에서 비롯된 면도 크다. ‘사막의 우물’처럼 외로웠던 두리반의 곁을 지킨 이들은 ‘전문 시위꾼’들만이 아니었다. 서울 홍익대 앞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많은 인디신들과 예술가, 활동가, 수많은 시민들이 두리반에 모여들었다.

서울 용산 참사의 기억이 시민들과 홍대를 근거지로 한 전방위 문화·예술 활동가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일까. 이름보다 별명으로 불리길 원하는 흑마늘, 대원군, 멍구, 한받, 엄보컬, 김선수 등 ‘날라리 예술가들’은 특유의 발랄함과 생동감으로 게릴라처럼 두리반을 ‘점령’했 다. 이들은 인정머리 없는 거대 자본의 폭력에 맞서 새로 운 형식의 퍼포먼스와 문화운동 방식으로 ‘비폭력 문화 농성’을 펼쳤다. 그들의 발칙함은 ‘다큐멘터리’가 되었고, ‘칼국수 음악회’ ‘두리반 문학포럼’ 등 다양한 문화행사와 문화운동으로 기획돼 대중의 참여와 공감을 이끌어냈 다. 다른 운동 방식의 한 전형을 보여준 두리반의 날라리 들은 이후 ‘85호 타워크레인’으로 향하는 희망버스에 올 랐고, ‘강정마을’을 찾았으며, ‘명동 마리’에서 연대를 이 어갔다. 느슨하고 자율적이면서도 재기발랄하고 견고한 연대가 거기에 있었다.

“철거민들의 처절한 투쟁 함께해달라”

무자비한 폭력으로 소시민의 삶을 몰살하는 자본의 철거 폭력은 그대로였으나, 그에 저항한 운동 방식은 새 롭게 진화했다. 이른바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다. “웃으 면서 싸워야 함께 싸울 수 있고, 함께 싸워야 끝까지 싸 울 수 있기 때문”이다. 두리반은 사막의 우물에서 즐거운 ‘연대의 우물’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결국 대기업은 두 리반에 무릎을 꿇었다. 지난해 11월 두리반은 보상을 받 아 새로운 가게를 열었고, 서로에게 걸었던 소송은 취하 됐다. 골리앗을 상대로 한 전례 없는 승리였다.

하지만 저자는 승리에 자족하지 않는다. 여전히 힘겨 운 싸움을 벌이는 철거민이 많은 까닭이다. 그는 와의 인터뷰에서 “중요한 건 두리반 철거농성의 승리 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라며 “두리반 때문에 힘을 얻 은 명동3구역 철거민들, 북아현동 철거민들에겐 두리반 처럼 생계 터전을 되찾는 게 목적”이라고 전했다.

유채림씨는 두리반 사태의 당사자이자 소설가다. 생업 인 편집일을 내려놓고 아내와 더불어 싸움의 복판에 섰 다. “철거민이 겪는 육체적·정신적 모멸감을 철거민 당 사자의 시각에서 그려 재개발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싶었 다”는 유씨는 “떼써서 한몫 챙기려 한다는 오해를 받는 철거민들의 처절한 투쟁에 시민들이 함께해달라”고 마지 막 말을 남겼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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