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장학회는 복잡한 문제가 아니다. 이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국가권력을 악용하여 자행한 인질납치 강도극이다. 사람을 잡아다가 가둬놓고 협박하여 몸값으로 뜯어낸 것이 문화방송과 부산문화방송과 부산일보 등 언론 3사와 부산시내 토지 10만 평이었다.”
무협지처럼 술술 읽혀명쾌하다. ‘정수장학회 저격수’ 한홍구(53) 성공회대 교수가 펴낸 (돌아온산 펴냄)의 머릿말이다. ‘장물바구니’는 정수장학회를 일컫는 말. 김지태 회장에게서 빼앗은 언론사들을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5·16장학회’에 담았으니 바구니라는 것이다.
사실 문제는 정수장학회 자체(권력까지 빼앗은 자들인데 뭔들 못 빼앗았겠나)보다, 박근혜씨가 유력한 대선 후보가 되는 동안 정수장학회 사건을 다룬 변변한 연구서 하나가 없다는 사실에 있는지 모른다. ‘박정희 정권의 기본 성격과 한국 언론사를 정립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인데 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도대체 현대사나 언론학을 공부한다는 사람들은 뭐하고 있는 거야?’라는 탄식도 나올 법하다. 그러나 한 교수는 “남 탓을 하려고 보니 정작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자료도 많이 봤고, 이미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에서 사건 조사 및 보고서 작성에 깊게 관여한 바 있으니 이 문제에 대해 쓴다면 내가 적임자였다”고 실토하고 만다. 이 책은 그러한 자임의 결과다.
모두 4부로 구성된 이 책의 1부는 김지태는 누구이고, 왜 하필 박정희는 김지태의 재산을 강탈했으며, 김지태 재산 중에서 왜 하필 언론사를 빼앗아갔는지를 다룬다. 2부는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김지태에게 덮어씌운 혐의는 어떤 것이고, 인질강도들은 어떤 방식으로 몸값을 뜯어냈는지를 추적한다. 3부는 몸값으로 뜯어간 언론 3사를 5·16장학회라는 장물바구니에 담은 인질강도들이 ‘장학회’를 어떤 방식으로 운영해왔는지를 밝힌다. 4부에서는 억울하게 강탈당한 언론 3사와 부일장학회의 기본 재산으로 삼으려던 토지 10만 평을 되찾으려고 김지태 회장과 유족, 그리고 시민사회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왔는지를 서술한다.
한홍구 교수가 정수장학회의 진실을 파헤칠 적임자라는 점은, 복잡다단한 사건을 풍부한 자료와 쉬운 입말로 명료하게 풀어낸 필력에서도 그대로 증명된다. 어처구니없는 현대사의 한 장면을 전하고 있지만, 책은 마치 무협지처럼 술술 읽힌다. 1971년 MBC지방국을 매각해 박정희 대통령 후보 선거자금으로 썼다는 의혹이 제기된 점이나, 박근혜 의원이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맡게 된 경위와 관련해 드러난 새로운 사실 등도 흥미를 더한다.
기사를 쓰며 되도록 책의 내용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으려 했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오늘까지도 ‘살아 있는 과거’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가 공들여 밝힌 ‘왜 김지태였는지’ ‘왜 그의 언론사였는지’는 살짝 누설(?)하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는 처음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 박용기에게 김지태를 조사하라는 지시를 했을 때 언론사를 강탈하려는 자신의 속셈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원하는 것은 언론사였다. 김지태의 처벌은 그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135쪽)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가 왜 언론사를 원했을까?
“정수장학회 해체 뒤 새 공익법인 세워야”저자는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단독으로 크게 보도한 것도, 그리하여 들불처럼 일어난 4·19혁명을 주도적으로 방송한 것도 김지태가 소유한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이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실제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은 그 공로로 장면 정부의 표창을 받았다. 4·19 당시 부산에서 군수사령부 사령관으로 근무한 박정희는 이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홍구 교수는, 대구사범 동기로 쿠데타 모의를 함께 할 정도로 가까웠던 부산일보 주필 황용주가 박정희에게 언론의 중요성을 번번히 일깨워줬다고 덧붙인다.
그렇게 빼앗은 언론 3사가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한 오늘, 저자가 제시하는 정수장학회 문제의 해법은 간명하다. “장물로 이루어진 정수장학회는 해체되어야 마땅하다. 재단법인이 해체를 결의하면 그 재산은 국고로 귀속되는데, 인질 납치극 주범이었던 대한민국은 이 재산을 유족에게 돌려주어 김지태 회장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새로운 공익법인이 탄생하도록 해야 한다. 현 이사진이 총사퇴하고 김지태 회장 유족과 김지태 회장의 유지를 계승할 수 있는 사람들로 이사회가 전면 재출발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 책의 서두에는 서해성 소설가와 함께 한 ‘직설’ 가상대담이 실렸다. 1982년 천추의 한을 품고 세상을 뜬 김지태 회장의 넋을 해원하고 독자들의 이해를 도우려 마련된 3자 가상 대화에서 서해성씨는 말했다. “한홍구가 우리 편이길 망정이지, 한 번 물면 질겨.”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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