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11월11일, 오카모토 미노루 중위는 군사 쿠데타를 주도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신분으로 다시금 일본 땅을 밟는다. 과거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에 신경(현 창춘)에 있던 만주국 육군군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마지막 황제 푸이로부터 금시계를 하사받았다는 오카모토, 곧 박정희에게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겪은 2년 동안의 본과 과정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체험이었다. 근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지난날의 황국 땅에 다시 발을 들인 박정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청년 시절, 국가사회주의에 매료된 기시
그날 도쿄 내 총리 관저에서 벌어진 만찬회에서 박정희는 전직 총리 기시 노부스케를 처음으로 대면한다. ‘쇼와의 요괴’라 불리는 기시는 전전(前戰)에는 국가 개조의 혁신 관료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고, 전후에는 일본의 고도성장 틀을 만들며 미-일 안보조약 개정을 주도한 인물이다.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 두 사람에게는 만주국이라는 공통의 ‘성장배경’이 있었다. 박정희를 ‘군인’으로 변신시킨 것도, 기시 노부스케를 ‘정치가’로 단련시킨 것도 모두 만주제국이라는 대일본제국의 분신이었다. 이 둘이 가까운 사이가 되어 한-일 유착의 상징이 된 것은 우연이었을까?
도쿄대학 강상중 교수와 훗카이도대학 현무암 교수의 (책과함께 펴냄)는 해방 뒤 한국과 전후 일본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한 관료 정치가와 군인 정치가를 통해 만주국의 역사, 그 제국의 유산을 밝힌 책이다. 특히 저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만주제국에서 시행한 통제경제의 ‘실험’이 한국의 개발독재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박정희가 추진했던 병영국가적인 국력 배양과 총력 안보라는 ‘한국적 민주주의’에 만주제국의 유산이 고동치고 있다는 것. 저자들은 이 유산을 낳은 주인공이 ‘만주국 산업개발 5개년계획’을 입안하고 실행한 기시 노부스케였다고 말한다.
기시 노부스케가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한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했고, 또 그해에 박정희는 식민지의 어느 한촌에서 태어났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말기, 공산주의 전성기에 대학을 다닌 청년답게 광신적인 국수주의와 천황 절대주의가 마뜩지 않았던 기시는, 사회주의자인 기타 잇키의 을 읽고 국가사회주의에 입각한 조직적이고 구체적인 사회개혁 노선에 깊이 매료된다. 사실 “기획원을 본거지로 군부 막료층과 손잡고 고도국방국가로의 개조를 담당한 이들 혁신관료 그룹은 모두 젊은 시절에 일반적 풍조로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적인 사회과학의 영향 아래 있었다.”
뒤처진 농업국이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를 통해 일거에 공업국으로 변모해가는 그 압도적이고 다이내믹한 전환에 강한 영감을 느낀 기시는 러시아 유학파 미야자키 마사요시 등과 함께 국가사회주의적인 통제계획경제를 내용으로 하는 국가 건설 실험을 만주에서 시도했다. 주요 산업 부문의 국가적 통제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이 그 고갱이였다. 청년장교로 통제경제를 직접 경험한 박정희에게 만주국 모델은 훗날 가장 가용 가능한 선택지 가운데 하나였을 터.
실제 만주국과 박정희의 한국은 예사롭지 않은 유사성을 보인다. 소련 혹은 북한과 대치하는 방공(防共)국가, 중앙집권적인 군부독재, 반공적인 국민 통합 이념, 국방산업과 연계된 중화학공업화, 관료 주도에 의한 계획경제적인 자본주의 산업의 구축 등 양자 사이에는 총동원 체제에 의한 국가 주도, 대외 지향, 성장 지향 등 많은 닮은점을 찾을 수 있다.
‘독재자’와 ‘요괴’의 재림을 경계하라
이뿐만 아니다. 5·16 직후의 국가재건운동이나 만주국협화회를 방불케 하는 새마을운동 따위의 국민개조운동,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 등의 국가주의 맹세 의례, 군사교육, 충효교육, 라디오체조와 ‘국민가요부르기’운동, 퇴폐 풍조 일소와 미풍양속 고취, 반상회 등 유신시대를 전후해 시행된 수많은 정책과 기구는, 일본제국주의가 식민지 조선과 만주국에서 실행했던 국가주의 요소를 그대로 본떠 부활시킨 것이었다. 이처럼 만주를 시원으로 한 박정희 개발독재 모델은 그의 사후에도 죽지 않고 아들 격인 신군부 출신 전두환·노태우에 의해 계승돼왔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권부를 장악한 만주 인맥의 폭과 넓이를 고려할 때, 저자들의 주장을 결과론적 해석이라고 치부하긴 어려워 보인다. 박정희를 차치하더라도, 백선엽(육군대장)·정일권(육참총장·국무총리)·신현준(초대 해병대사령관)·최규하(대통령)·김창룡(특무대장)·이선근(초대 정신문화연구원장) 등 한국현대사에 어두운 흔적을 남긴 많은 이들이 만주를 제 뿌리로 삼고 있다.
박정희와 기시를 오가며 한국과 일본의 현대사를 상호 교호의 과정으로 흥미진진하게 다룬 이 책을 읽는 마음은 착잡하다. 그 착잡함은 사회주의가 ‘국가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속류화된 것이나 파시즘과의 이념적 근친성을 새삼 확인하는 일에서 나오기보다, 기시 노부스케의 통제경제 정책과 박정희의 발전국가론으로부터 일본과 한국 사회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흘러나왔다.
민주주의가 결여된 통제받지 않은 통제경제는 그저 전체주의에 불과했다는 비판보다, 자식들(박정희의 장녀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 기시 노부스케의 손자 아베 신조 전 총리)을 통한 ‘독재자’와 ‘요괴’의 재림을 경계해야 하는 일이 긴급한 이유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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