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26일, 김재규가 쏜 총알은 유신의 심장으로 날아갔다. 예기치 않은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은 견고한 병영국가의 중심을 흔들었다. 많은 이들이 좋은 시절을 기대하며 희망의 80년이 시작됐다. 하지만 12·12 군사반란을 감행한 전두환 세력은 ‘오월 광주’를 피로 물들이며 많은 이들의 희망을 절망으로 바꿔버렸다. 그해 7월, 서울에서 미스유니버스 대회가 열렸다. TV와 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수영복 미녀들의 소식이 보도됐다. 그리고 12월에는 컬러TV 방송이 시작됐다. 컬러TV와 함께 비디오카세트리코더(VCR)가 보급됐다. 비디어대여점을 통해 불법 복제된 성인비디오가 유통됐고, 1983년 을 시작으로 성인에로영화가 붐을 이뤘다. 5공화국 정권은 두발자유화, 교복자유화, 통금해제 등 유신시대의 문화통제 수단을 파격적으로 풀어주며 정치적 관심을 대중문화로 돌리려 했다. 만화에 대한 통제도 조금 느슨해졌고, 합동문화사와 소년한국일보사 두 회사의 독점 체제도 깨졌다. 1982년 프로야구 개막 이후 1983년 이현세의 이 장편 서사만화 붐을 끌어냈다. 재벌만화, 스포츠만화 등이 만화방에 시리즈로 공급되며 붐을 이루었다.
1982년 10월 육영재단에서 460여 쪽의 두툼한 만화 전문 월간잡지 (이하 )을 창간했다. 육영재단은 1964년 당시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설립한 재단으로 어린이회관을 운영하는 한편 어린이 잡지 를 출간했다. 1970년대 는 과 함께 어린이 잡지 트로이카의 주역이었다. 어린이 잡지는 본지에 기사와 만화, 그리고 별책부록만화로 구성됐다. 당연히 어린 독자들의 관심은 만화, 특히 별책부록을 통해 제공된 불법 일본만화(주로 다시 그린) 등에 쏠려 큰 인기를 얻었다.
1970∼80년대 다른 문화처럼 출판 분야도 일본 출판물을 참조(때론 불법으로 번역)했다. 1970년대 만화잡지 부록으로 일본의 인기 만화(이나 , 같은)들이 소개됐을 정도지만, 만화 전문 잡지는 나오지 않았다. 그 원인은 유신시대에 신규 매체 창간이 어려웠으며, 만화 탄압이 일상적이었고, 3대 어린이 잡지가 실질적으로 만화잡지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해본다. 만화잡지가 나오면 성공한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았지만 정부의 허가가 발목을 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1982년 10월, 박근혜씨가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그달에 만화 전문 잡지 창간호가 나왔다. 9월부터 대대적으로 신문광고까지 동원한 창간호는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 이현세의 를 표지에 올리고 로 인기 작가 반열에 오른 허영만의 야구만화 , 김철호의 축구만화 , 70년대 최고의 인기 작가 이상무의 비극적 학원물 , 70년대 대표적 공상과학(SF) 만화가 고유성의 , 역시 70년대 최고 인기 작가 중 한 명인 강철수의 , 동물만화로 이향원이 어니스트 시턴의 작품을 각색한 , 순정만화로 정영숙의 을 선보였다. 70년대 메인 스트림인 명랑만화는 길창덕의 와 윤승운의 , 김영하의 가 연재됐다. 여기에 벨기에의 대표 만화가 에르제의 과 영화를 만화로 옮긴 <e.t.>, 심지어 추리만화인 와 인물만화 , 반공만화(이지만 스파이액션물에 가까운)인 신영식의 까지 모든 장르를 아우른 그야말로 만화잡지였다. 은 창간호부터 선풍적 인기를 이어갔다. 정확한 판매 통계가 없어 알 수 없지만, 은 1980년대 한국 만화의 지형을 바꾸었다. 1970년대 3대 어린이 잡지는 차례로 폐간하거나, 아니면 만화잡지로 변신했다. 의 성공으로 1980년대 어린이 만화는 대본소를 떠나 만화잡지로 시스템을 전환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기억하는 인기 캐릭터인 둘리, 요정 핑크, 하니, 악동이도 모두 출신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도 1990년대 들어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1996년 폐간했다.
얼마 전 서울문화사는 2012년 12월25일 학습만화잡지 을 창간한다고 SNS 등을 통해 홍보하기 시작했다. 1982년 창간호를 손에 쥐고 가슴 떨렸던 소년은 40대가 되어, 학습만화잡지가 되어버린 시대를 아쉬워한다.
박인하 만화평론가·청강문화산업대 교수</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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