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어느 나라나 권력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반역’이다. 한족의 땅 중원을 지배하게 된 만주족의 나라 청 왕조는 더욱 이 반역을 경계해야 했다. 청나라 사상 가장 잔인하고 치밀한 황제 옹정제는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반역에 대비한 지배자였다.
이 옹정제 치하에서 뜻밖의 일이 일어난다. 1728년, 한 지방 총독이 황실에 긴급보고를 올렸다. 쩡징이란 자가 옹정제를 살인마라고 비난하며 한족을 모아 혁명을 하자는 편지를 보내왔다는 것이다. 당연히 쩡징은 잡혀 끌려갔다. 그런데 옹정제는 뜻밖에도 이 반역자를 살려둔다. 그러고는 직접 쩡징을 글로 교화하기 시작했다. 무려 1년에 걸쳐 쩡징이 주장한 비방을 황제가 글로 논박하며 청 왕조의 정당성을 가르쳤다. 결국 쩡징은 황제에게 설득당했고, 황제는 그를 용서해 풀어주기까지 했다.
옹정제에게는 숨은 목적이 있었다. 진정 한족을 지배하려면 힘으로 억누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합리적이며 위대한지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황제가 쩡징을 가르친 편지와 쩡징의 반성문을 모아 이란 정권 홍보용 책자를 찍어 전국에 수십만 부를 뿌렸다.
그러면 대중은 이 책을 보고 과연 감복했을까? 정반대였다. 한족 백성들은 쩡징이 청나라에 감화되었다는 결론보다는 책 안에 쓰여 있는 청 황실에 대한 비방들만 기억했다. 의도와 달리 책이 청조에 대한 반감을 부추기자 황실은 부랴부랴 책을 금서로 지정했지만, 이게 더욱 심각한 역효과를 불렀다. 사람들은 책에 담긴 내용이 진실이어서 금서가 된 것으로 확신했다. 결국 은 청 황실을 두고두고 괴롭힌 ‘반역의 책’이 돼버렸다.
은 정권을 유지하려는 수단이 거꾸로 정권을 위협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그리고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나 똑같은 법. 한국에서도 이 책과 똑같은 운명이 된 책이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전두환 정권은 북한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을 자극해 국민을 더욱 국가에 충성하게 만들려고 당대 최고의 만화가인 허영만 화백에게 공산주의의 허망함과 문제점을 알려주는 만화를 의뢰했다. 그래서 나온 만화가 이다. 만화는 주인공 이강토가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며 공산주의에 심취해 월북하지만 결국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남한으로 내려와 새 삶을 산다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만화가 너무나 뛰어났다는 점이다. 쉽고 재미있게, 그러면서도 역사와 인간이란 주제를 심오하게 다룬 덕분에 이 책에 가장 열광한 집단은 이른바 ‘운동권’ 대학생들, 지금의 ‘486 세대’였다. 이념이란 무엇인지, 혁명은 어떤 것인지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어 은 사회와 민주주의에 관심 많은 대학 새내기들에게 선배들이 권하는 ‘필독서’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을 짓눌러온 군사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이끄는 주역이 되었다.
만화는 과장이 쉽고 흡입력이 강해 언제나 프로파간다의 동반자였다. 독재정권이 정권 유지용 홍보 매체로 만화를 고른 것도 그 이유에서였고, 대학생들이 만화를 비판정신의 참고서로 삼은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은 정권에 대한 저항정신을 고취시켜 결국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한몫했다는 점에서 보다도 훨씬 강력한 ‘반역의 책’이었다.
구본준 기자 책·지성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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