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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좌파를 상상하라

유럽 좌파정당의 무기력한 오늘을 비판하며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하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11월호
등록 2011-11-18 15:57 수정 2020-05-03 04:26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가 사임을 발표했다. 그의 몰락은 어린이 성매매 추문 때문도, 비민주적인 정치 운영 때문도 아니었다. 그를 꿇어앉힌 것은 얄궂게도 재정위기의 여파로 불어닥친 이탈리아 경제위기였다. 그의 도덕적 결함에 관대했던 이탈리아 사람들도 살림살이가 팍팍해지는 건 용인하기 힘들었던 것일까.

지리멸렬한 유럽 좌파정당들

범부들의 됨됨이보다 못한 그가 총리 자리를 17년간이나 꿰찰 수 있었던 것은, 언론 장악과 권모술수적 정치 리더십도 한몫했겠지만 이탈리아 좌파(정당)의 무기력도 한 배경을 이루었을 터다. 그것도 “강력한 공산당이 존재하고 그람시를 비롯한 다양한 비판 이론으로 오랫동안 유럽 좌파에 정치적 영감을 준” 이탈리아에서 말이다. 이탈리아의 언론인 프란체스카 란치니는 한국판 11월호에서 이탈리아 좌파정당의 지리멸렬한 오늘과 그 원인이 된 어제를 조망한다. 2007년 좌파 진보주의 연합과 가톨릭 민주당의 합작으로 탄생한 중도좌파 개혁주의 성향의 이탈리아 민주당은 “정치적 색깔이 모호하고 타협적이며, 소외계층의 처지에 무관심하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이처럼 기층 민중과 좌파정당이 멀어진 사이, 상당수 노동자들이 인종차별적인 북부동맹을 지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란치니는 “1980년대부터 이탈리아 전역에 중대한 변화가 찾아왔다”며 “대규모 산업이 분화하며 노조의 분열을 가져왔고, 세계화 과정에서 양산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소외되고 고립됐다”고 지적했다. 기존의 좌파정당은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에 속수무책이었고, 노동세계에 새롭게 출현한 노동자들은 당에 자신을 의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유럽의 좌파정당도 별반 다르지 않다. 세르주 알리미 프랑스판 발행인은 유럽의 좌파정당들이 “일단 정권을 잡은 뒤에는 그들의 적과 별로 다르지 않은 정책을 추진한다”며 “이렇게 기존 경제 질서는 그대로 유지되고 부유층의 재산은 보호된다”고 일갈한다. 그는 집권한 좌파정당들이 “갖가지 ‘제약’이나 ‘과거의 유산’(생산 부문의 국제경쟁력 약화, 과도한 정부 부채 등)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자신의 우유부단함과 소심함을 변명”하지만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이 강요한 긴축정책을 받아들인 것은 다름 아닌 사민주의 정부들”이었다고 비판한다. 알리미는 “지난 30년간 투기자본이 국가경제를 맘대로 주무를 수 있도록 고안된 수많은 규정이 온존하는 한, 느슨한 개혁이라도 성공시키려면 과거와 철저히 단절해야 한다”며 “국제적 고립, 인플레이션, 신용평가 점수 강등 등을 감수”하려는 의지만이 유럽 좌파정당이 자본주의 체제와 단절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제도정치 밖에서 역동적인 진보를

진보정당의 역사와 성과가 일천한 한국 사회의 고민은 더 깊다. 홍성일 문화연구자는 안철수의 사상에 “계급의 문제는 없다”며 “그는 진보의 가장 큰 무기인 반자본주의의 날까지 무디게 만든 합리적 보수주의자”와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제 진보는 제도정치와 이별을 고하며 더욱 모험적인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한다. “진보는 자신의 가능성이 상식으로 보수화되는 동시에 이로부터 자리를 떠나 새로운 진보의 가능성을 발굴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제도정치 바깥에서 진보의 역동성을 보여준 희망버스와 홍익대 앞 두리반, 명동 마리의 투쟁은 그 증거들이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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