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해적’의 공통점은 뭘까? 둘 다 ‘낭만적’이라는 점이다. 우리 현실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일까. 낭만적 이미지가 실체보다 먼저 와 닿는다. 그런데 그 먼 것들이, 이미지가 아닌 실체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금 우리 현실에 당도했다. 그 끝이 어디로 향할지 모르겠으나, 멀리 이집트에서 혁명은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이고, TV를 켜면 진짜 해적의 얼굴이 눈 앞에 바짝 다가와 앉는다. (르 디플로) 한국판 2월호는 혁명과 해적을 호출한다. 낭만은 없다.
“불가능이 도래했다”
마그레브(리비아·튀니지·알제리·모로코 등 아프리카 북서부 일대)의 소국 튀니지에서 시작한 시민혁명이 아랍권에 나비효과로 나타나고 있다. 프랑스판 발행인 세르주 알리미는 “불가능이 도래했다”고 표현했다. 는 그 불가능이 어떻게 도래했고 어디로 나아갈지에 대해, 지금 한국에서 접할 수 있는 가장 자세한 정보서이자 체계적인 분석서다.
튀니지 혁명에 지도부가 없었다는 사실은 한국 언론에도 소개됐다. 미국 인권단체 ‘휴먼라이트워치’의 자문위원인 엘 알라우이 히참 벤 압랄라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저항이 조직되지 않은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 반대였다면 분명 권력에 의해 곧 진압됐을 것이란다. 지도부보다 탁월한 지도자는 인터넷 네트워크였다. 대본은 없었지만 플롯은 있었다. 분노는 차곡차곡 쌓여왔고, 지배 권력이 놓친 좁은 틈새를 고학력 실업자 젊은이들이 먼저 파열했으며, 지식인들이 가세했다. 군은 중립을 지켰고, 노동자 총파업이 이어졌다. 독재자 벤 알리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순간, 때는 이미 늦었다.
튀니지는 이웃 나라들의 현 상황을 비춰주는 네거티브 이미지다. 사정은 제가끔 조금씩 다르지만, 이들 나라의 지도자들은 지금 깊은 수심에 잠겨 있다. 이집트가 가장 먼저 나비 날갯짓의 폭풍에 휩싸였고 알제리와 수단에서도 “튀니지처럼”이라는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이들은 독제체제와 야합하는 서방국가들의 태도를 식민주의의 연장이며 새로운 방식의 제국주의라고 본다. 서방국가들이 최소한 호의적인 중립적 태도를 견지하지 않는다면 나비효과는 ‘문명의 충돌’로 형질전환할지 모른다.
아프리카의 혁명 주체와 아프리카의 해적은 적대관계이거나, 적어도 완전히 별개일까? 김완 기자는 한국 언론에서 격정적으로 소개된 ‘아덴만 대첩’ 너머 소말리아의 어제와 오늘을 얘기한다. 소말리아를 국제사회가 공인하는 최악의 ‘실패 국가’(Failed State)로 만든 건 소말리아 해적도 아니고 소말리아 민중도 아니었다. 아프리카의 관문인 소말리아는 냉전의 격전지였다. 미국과 소련이 경쟁적으로 소말리아 군벌들을 무장시키면서, 소말리아는 끝없는 내전 상태에 빠졌다. 한국 배를 비롯해 대규모 원양어선이 소말리아 앞바다를 휩쓸면서 주산업인 어업이 궤멸했고, 서방국가들은 그 바다에 폐기물을 투기했다. 그리고 마침내, 소말리아 최고 ‘엘리트 직종’인 해적이 출현했다. 는 묻는다. 누가 진짜 해적인가?
한국 언론, 민주주의의 스토커
는 한국 특집으로 ‘민주주의의 스토커, 언론’을 다뤘다. 언제나 민주주의와 함께 연상작용을 일으키며 신성화된 ‘언론의 자유’에 대해 그 기원과 실태를 분석하고, 그 자유가 ‘누구의 자유이어야 하는가’를 깊게 따진다. 또 ‘MB 사전에 레임덕은 없다’ 기사에서 이명박 정권을 소노보-클렙토크라시(속물적 도적 지배 체제)로 규정하고, 진보 진영이 현 정권의 레임덕만 기대하지 말고 체제에 균열을 내고 흔들 수 있는 전략을 고민할 것을 주문한다. 그 밖에 기후변화에 내포된, 계급·국경·세대를 횡단하는 차별(기후불의)을 지적하는 것도, 혹독했던 겨울의 끝자락에 많은 사유거리를 던진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