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철학자 플루타르코스는 기원후 46년에 태어나 120년 이후까지 살았다. 그리스 문학이 쇠퇴기에 접어든 시기에 활동했음에도 그는 많은 글을 남겼다. 4세기 무렵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람프리아스 목록’에는 플루타르코스가 쓴 작품 227개의 제목이 수록돼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50여 편의 과 78편의 뿐이다.
플루타르코스는 대중에게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만큼 익숙한 이름은 아니지만,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의 숨결이 깃든 책장을 넘겨봤을지 모르겠다. 16∼17세기에 플루타르코스의 글이 유럽에서 프랑스어와 영어로 번역되면서 여러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예컨대 은 셰익스피어가 쓴 세 편의 로마극 에 영감을 제공했으며, 은 몽테뉴가 을 쓰는 데 모델 역할을 했다고 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에도 플루타르코스식의 공공 도덕, 개인 미덕에 대한 충고가 담겨 있다.
“분노는 중대한 일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닐세”
이 중 은 다양한 주제의 에세이 78편과 대화를 담고 있는 작품집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에서 당시 사회와 역사를 담은 일화와 도덕적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이들의 관점을 교차시키면서 활발하게 철학적 사유를 꾀한다. (천병희 옮김, 숲 펴냄)는 에 실린 작품 중 ‘수다에 관하여’ ‘분노의 억제에 관하여’ ‘아내에게 주는 위로의 글’ ‘동물들도 이성이 있는지에 관하여’ ‘소크라테스의 수호신’ ‘결혼에 관한 조언’ 등 6편의 글을 담는다. 비교적 가벼운 글체와 대중이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 철학적 논지는 한때 학자들로부터 “철학자로서의 깊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단어와 문장 사이에는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가지를 뻗쳐온, 서양 사상의 근간이 되는 사유가 깃들어 있다. 사료로서의 가치가 인정되면서 다시 역사가와 철학자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작품집에 실린 다양한 사례는 글을 풍성하게 만든다. 이 예시들은 현대의 독자가 읽기엔 조금 고리타분할 수 있는 주제도 흥미롭게 읽히게 하는 힘의 근원이다. 이를테면 ‘수다에 관하여’는 수다는 왜 불필요한가에 주력하는 글인데, 한마디로 ‘침묵은 금이다’와 같은 이야기다. 재기 있는 이야기꾼인 플루타르코스는 수다의 불필요성에 대해 드라마틱한 예를 들어 독자의 시선을 붙들려 한다. 로마가 네로에게서 해방돼 다시 공화국이 되려고 시도하던 때다. “준비는 다 되어 있었고 하룻밤만 지나면 폭군은 죽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폭군을 암살하기로 되어 있던 사람이 극장에 가다가, 네로 앞으로 끌려가느라 포박당한 채 궐문 앞에서 신세타령하는 죄수를 보고는 그에게 다가가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이봐요, 오늘만 지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오. 내일이면 그대는 나한테 감사하게 될 거요.’ 죄수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내 알아차리고는 (중략) 더 확실한 살길을 선택했으니, 들은 대로 네로에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러자 음모를 꾸미던 자는 즉각 체포되어 (중략) 고문을 당하고 불로 지져지고 채찍질을 당했다.”
이어 실린 ‘분노의 억제에 관하여’는 대화 형식을 빌려 분노에 대한 사유를 끌어낸다. “분노는 항상 중대한 일로만 시작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세. 오히려 농담, 장난스러운 말, 웃음, 고갯짓 등이 많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한다네”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것 같지 않다. 현재의 우리 역시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쉬이 화내지 않는가. 현대의 의사들이 병의 근원을 스트레스에서 찾듯, 플루타르코스 또한 ‘의사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의 말을 빌려 분노의 위험성을 전한다. “히포크라테스는 환자의 용모가 가장 심하게 달라지는 병이 가장 위험한 병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분노 때문에 정신이 흐트러지는 자들이 용모와 낯빛과 걸음걸이와 목소리가 가장 심하게 변하는 것을 보았네.”
‘아내에게 주는 위로의 글’은 두 살배기 어린 딸 티목세나가 죽어 슬퍼하는 아내를 다독이고, ‘동물들도 이성이 있는지에 관하여’는 오디세우스와 돼지로 변한 인간 그뤼롤스의 토론을 통해 동물이 인간보다 오히려 용기·절제·지혜가 한 수 위라는 논지를 전개한다. ‘소크라테스의 수호신’은 테바이가 스파르타의 지배에서 극적으로 해방된 과정을 긴박한 대화를 통해 전달한다. 마지막 장에 실린 ‘결혼에 관한 조언’은 당시의 암묵적인 결혼 규칙을 담고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결혼에 관한 조언’은 2000여 년 전의 결혼 규칙이다 보니 현재의 것과 상충하는 부분이 자주 눈에 띈다. 예컨대 “남편이 다른 여자(첩이나 하녀)와 무절제하고 방종하게 놀아나는 것은 (적어도 아내에게는 무절제하게 행동하지 않으므로) 아내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라고 생각해봐야 하오”와 같은 문장은 남성 중심적이다. 인내력이 부족한 독자로서는 이 장을 대충 읽고 넘길 수밖에 없다.
최초의 ‘원전-우리말’ 번역
는 번역 과정을 여러 번 거치지 않고 그리스어 원전에서 처음으로 우리말로 바로 번역됐다. 원전에도 묻어 있을 듯한 플루타르코스의 위트가 한국어로 옮긴 문장에도 그대로 녹아 있으며, 이해가 쉬운 의역도 눈에 띈다. 이를테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같은 번역들이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도덕적·역사적 전통과 기원을 짚을 수 있는 지점도 문맥 곳곳에 산재한다. 그러나 성소수자·신분·여성에 대한 시선이 차별적이며, 배려 또한 옹색한 점은 여전히 불편하다. 하지만 그를 탓하기에는 플루타르코스의 시대에서 2천여 년이 지난 지금, 한 방송사의 드라마에 대고 “게이 된 내 아들 에이즈로 죽으면 책임”지라는 광고글을 대문짝만하게 싣는 현실 또한 옹색하고 부끄럽다. 불편한 지점들 역시 현재까지 면면히 전해지는 사상에 영향을 준 바탕으로 이해해야 하는 걸까.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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